詩쓰기 126

허수아비 근황

허수아비 근황 황희순 티브이 화면 가득 촛불이 일렁여요 그가 화면에 비친 아들 손을 잡으려 팔을 길게 뻗어요 촛불 든 허수가 아비를 불러요 아버지이~ 한쪽으로만 열린 그들 귀는 목청을 돋워도 들리지 않아요 서로서로 만들어놓은 상하좌우 벽을 누구도 넘을 수 없어요 벽은 나날이 견고해지고 발자국마다 노여움이 고여 넘치려 해요 한 무리는 뒷걸음하고 한 무리는 게걸음하고 또 한 무리는 뛰어가며 정답이라고 우겨요 어깨 겯고 나란히 걷던 시절이 있긴 있었던가요 가상도 현실도 아닌 곳에서 쪼글쪼글 홀로 시들어가는 베이비부머 J, 당당하던 걸음걸음은 누가 비틀어놓았을까요 한때 사람속(屬)이었던 그의 꼿꼿한 뼈는 누가 다 뽑아갔을까요 ___ 2022. 하반기.

詩쓰기 2023.01.15

진실한 마음 삽니다

진실한 마음 삽니다 황희순 테미네거리‘인간서비스센터’에서는 고장난인간을고쳐준다는데 아무도모르게구제한다는데 어떤소원이든들어준다는데 의사가모르는병도물로불끄듯한다는데 의심하면효험이없다는데 진심만있으면된다는데 세상답을다알고있다는데 …… 우리의애틋한시간은다시올것같지않아 신통방통한곳이가까이있는데 이땅은왜첩첩지뢰밭인거니 도통하면일년을백년을 전광석화로살수있을텐데 밤은왜이토록긴거니 진실한맘은어떻게생긴거니 얼마면되니/그런데말이야 그곳은쥐새끼만들랑거리는지 셔터가바닥에닿을듯말듯늘걸쳐있어 의심하는인간은혹시 쥐로고쳐서내쫓거나구워먹는건아니겠지? __ 2022. 하반기

詩쓰기 2022.12.21

꿈꿈

꿈꿈 황희순 천천히 숨을 쉬면 시간이 정말 천천히 갈까요* 감춰놓은 시간은 왜 광속으로 사라지는 걸까요 신은 우리 몸에 천사 얼굴을 한 악마를 한 마리씩 심어놓고 구경한대요 이 구역 모든 일은 악마가 결정해요 시간은 악마의 무기, 그러니 누가 희망을 말하겠어요 그렇다고 절망만 있겠어요 사라진 시간만큼 발걸음 가벼워질 테니까요 쓸모없는 말은 천적의 먹잇감이라 늙은 기러기는 자갈을 입에 물고 날아간대요 나무와 돌멩이와 꽃이 왜 말을 하지 않는지 알 거 같아요 답답증이 밀려와도 숨 참아가며 견뎌야 해요 파도에 무엇이 밀려올지 모르잖아요 이렇듯 오래 꿈꿨어요 우린 별의 화석, 꿈에서 깨어나면 태초의 목록 α가 되겠지요 똑바로 걷는 건 두려운 일이에요 그러니 비몽사몽 헤매다 다시 별이 되겠지요 발밑은 여전히 어둠..

詩쓰기 2022.12.21

막다른 봄·1

막다른 봄·1 황희순 수월봉 앞바다 가득 빛나는 윤슬은 이 땅을 견딘 이들 눈빛이래 어두워지면 저쪽 하늘로 올라가 반짝인대 이쪽 모든 존재도 저쪽에서 보면 별같이 빛날지 몰라 죽은 이의 자리는 이쪽일까 저쪽일까 나는 살아있는 걸까 죽은 걸까 산비둘기는 전봇대에 앉아 나를 읽고 있다는 듯 그렇지그렇지, 그 말만 매일 되뇌다 사라진다 넌 어디로 날아간 거니 상현달 중천에 걸린 지금, 내 눈빛 보고 있는 거니 나도 너처럼 반짝이니 ______ 2022. 가을.

詩쓰기 2022.11.19

데이지꽃 필 시간

데이지꽃 필 시간 황희순 delete에 집착하는 내게 설렘 만지작거리는 그녀가 늑골 틈새 틀어막은 내게 거울 앞에 선 그녀가 꽃을 무시하는 내게 꽃향기에 손 뻗은 그녀가 눈물 글썽이는 내게 누군가의 웃음 그리는 그녀가 죽은 듯 멈춰선 내게 신호 위반하려는 그녀가 아무것도 아닌 내게 무엇이 되려는 그녀가 소곤소곤 귓속말하네 아주 쉽게 녹아내리는 입술 시작이고 끝인 그 벼랑은 아슬아슬한 빛을 품고 있지 스스로 그윽하여 거기, 한번 내디딘 혀는 영영 거둬들일 수 없지 봄내 부푼 데이지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은밀히 꽃을 피우고 __ 2022. 가을

詩쓰기 2022.11.01

사랑의 한 연구__‘Luyten b’의 한때

사랑의 한 연구 __‘Luyten b’의 한때 황희순 나뭇가지에 앉아 틈 비집고 들어갈 듯 들어갈 듯, C가 바위를 노려보고 있다. 공중에서 사뿐 내려온 A가 C의 뿔을 쑥 뽑아 들고 우거진 수풀 속으로 총총 스며든다. 그늘에서만 자라는 뿔, 하루를 견디려면 뿔을 잘 키워야 해. 뿔이 양식이자 내비게이션인 이곳에선 날개 없이도 꿈틀꿈틀 날아다니지. A와 C가 옥신각신하는 사이 또 다른 A가 숲에 내려앉는다. 칼바람 몰려오는데 B가 보이지 않는다. 아픈 뿔을 훔켜쥐고 바이러스로 뒤덮인 지구를 궁금해하더니 어디로 간 것일까. 뿔을 주머니에 욱여넣은 또 다른 A가 코를 벌름대며 두리번거린다. B를 찾는 게 분명해. 서로를 야금야금 뜯어먹는 전희가 그리운 거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이 별에선 표독해져야 ..

詩쓰기 2022.04.18

쇼케이스 __2022 대선전(大選戰) 관람기

쇼케이스 __2022 대선전(大選戰) 관람기 황희순 조만간 벗어던질 터이니 가면이라 해두죠. 가면 쓴 이들이 뻥을 튀겨요. 말 한마디에 총천연색 뻥이 활활 부풀어 올라요. 식용불가 뻥이 문득문득 해와 달과 별을 가려요. 어둠은 절호의 기회라며 사람들 눈과 귀를 쥐락펴락해요. 색이 다른 왼손과 오른손이 내 손을 우격다짐 잡으려 해요. 빈말들이 난무하는 늪이에요. 존경존경, 나를 존경하지 말라니까요. 존경보다 존중이 더 필요하다는 걸 왜 모르나요. 낡은 레퍼토리에 양념을 쳐가며 허겁지겁 받아적는 저 패들은 또 어느 행성 끄나풀인가요. 가짜 꼬리가 가짜 날개를 물고 하늘을 누벼요. 동물원이 따로 없어요. 어머, 순정한 동물들을 폄훼했군요. 빛나는 가을밤, 가면을 빨아대던 날파리똥파리기생파리들은 모두 어디에 붙..

詩쓰기 2021.10.17

파편들

파편들 황희순 주변을 얼씬대던 잠자리가 거미줄에 걸렸다 잠자리도 거미도 꼼짝 않는다 죽길 기다리거나 내 손 눈치챘거나 너희는 운명을 믿는 거니?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이튿날 거미줄엔 잠자리 파편만 하늘하늘, 거미는 여전히 지붕 밑에 딱 붙어 나를 노리고 내 껍질도 거미줄에 전시될지 몰라 우주를 말하자면 우리 서로 다를 게 뭐 있겠냐만 벽돌 던져 뱀을 죽인, 사람이든 무엇이든 별걸 다 고장 낸 너를 단박에 터트릴 수도 있는 무기, 자 봐 무소불위 나의 손, 열 개나 되는 이 손가락 그래서 말인데, 얘야 거미줄 치는 재주가 있다 해도 함부로 까불면 안 돼 모든 목숨은 비밀병기 하나는 품고 살거든 ___ 2020. 여름.

詩쓰기 2020.07.10

살생의 기억

살생의 기억 황희순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니 숨을 멈추고 우린 서로를 노려보았다 피할 수 없는 찰나가 천년이듯 흐르고 있었다 나를 죽일 수 있는 일생일대 기회가 온 거다 사람으로 변신한 내가 뱀으로 변신한 내게 힘껏 벽돌을 집어 던졌다 명중했다 한 뼘쯤 비어져 나온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수시로 나를 흔들어대던, 저 징그러운 슬픔 오른발에 온 힘을 실어 꾸욱 밟았다 good-by! 나의 슬픔, 뱀이던 나여 나는 자유다 살생을 거들던 그가 축 늘어진 나를 막대기에 걸쳐 들고 닭장 쪽으로 총총 사라진다 ___ 2020. 여름.

詩쓰기 2020.07.07

그러므로 백야

그러므로 백야 황희순 기와집 처마에 대롱대롱 매달린 두루뭉수리 인형, 달 밝은 깊은 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상처가 도져 꾼 꿈일 거야 한자리에서 너무 오래 하늘을 치어다보아 뭉그러진 얼굴, 녹아버린 발 뱀이었던 내가 꾼 꿈일 거야 눈이 없다면 슬픔을 어떻게 읽고 쓸 것인가, 눈물은 어디에 고일 것인가 길 잃은 만휘군상이 꾼 꿈일 거야 나의 몸 나의 슬픔 나의 모서리, 누가 내 살을 뭉텅 베어 처마 끝에 매달아 놓았나 불면이 비몽사몽 지어낸 꿈일 거야 무한 복제될 오늘, 끊어낼 수 없는 내일, 죽으나 사나 그 틈에 끼어 영원히 부대낄 수많은 나 꿈속의 꿈일 거야 __2020년 여름.

詩쓰기 2020.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