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쓰기 10

빛과 뱀과 나와

빛과 뱀과 나와  황희순  ◈  어릴 때 이야기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는 뱀이 징그럽긴 해도 겁먹지 않았다. 물린 적 없고 물린 사람도 못 보았기 때문에 산길이나 신작로를 가다 뱀을 만나도 도망가지 않고 구경했다. 학교 오가는 길에 뱀이 나타나면 남자친구 중 하나가 돌을 던졌다. 그러면 여러 명이 돌멩이 하나씩만 던져도 예닐곱 방은 맞으니 죽기도 했다. 할머니는 이웃 아저씨가 잡아 가져다준 뱀을 허리 아픈 아버지에게 약으로 고아주곤 했다. 하여 친구들과 함께 돌을 던져 죽인 뱀을 막대기에 걸쳐 들고 집에 간 적도 있다.  이삼십 대가 옥신각신 지나가고 사십 대 초반에 우환이 덮쳐들었다. 현실이 꿈만 같았고 자각하지 못한 어떤 일로 천벌을 받은 건지, 견디기 힘든 나를 극도로 혐오했다. 사람으로 살고는..

산문쓰기 2024.05.16

자발적 유배 비록

자발적 유배 비록 황희순 여행 떠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__헤르만 헤세 어디, 일탈하고 싶은 생각에 잠겨본 적 없는 이 있을까? 일탈뿐이겠는가. 모래알같이 많은 나날, 사표를 던지고 싶거나 불편한 누군가와 절연하고 싶거나 어려운 사업 접고 싶거나, 결정장애자처럼 망설이고 망설이다 인생 끝날 것 같아 속이 썩을 때 왜 없었겠는가. 실패할 용기가 가장 큰 용기라 했다. 유쾌하지 않은 일을 결행했다면 실패한 거나 다름없다. 그 후 생각지 않은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타의가 아닌 자의로 결정한 일이니 또 다른 용기로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지겨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돌고 돌다 제자리로 돌아오겠지만, 결국은 그렇게 될지라도, 새로운 환..

산문쓰기 2023.02.19

<문학 자서전> 새싹이 꼭 봄에만 돋는 건 아니므로

새싹이 꼭 봄에만 돋는 건 아니므로 황희순 프롤로그 울음이 길고 울었다 하면 하도 서럽게 울어 어릴 때 그 아이 별명은 울배기였다. 예닐곱 살 적엔 사춘기 언니가 자주 부르던 노래 ‘애수의 소야곡’을 뜻도 모르고 구성지게 따라 불러, 외가에 가면 이모들이 그 노래 불러보라며 반색을 했다. 공부도 제법 잘하던 아이는 열세 살 적 부모님 품을 떠나 대전으로 유학했다. 행복은 찰나 느끼는 감정이라는데……, 행복했던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시골에선 잘사는 편이었지만 부모님은 자주 다퉜고 여덟 살 터울인 언니의 노래는 늘 슬펐다. 스무 살 때 수면제를 모아 한 옴큼 먹고 40여 시간을 죽은 듯 자고 일어난 기억만 생생하다. 눈물과 시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편지와 일기 쓰기를 좋아하던 그 울배기 황희순은 삼..

산문쓰기 2020.12.21

임강빈 시비 건립기

임강빈 시비 건립기 황희순(시인) 프롤로그 오래전 일이다. 나는 정말 첩첩산중에서 마음에 상처를 입고 헤매는 중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잠잘 곳을 찾다 보니 선생님 댁 대문 앞에 내가 서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사하시어 남의 집이 되어버린 ‘대전 서구 도마동 126-2’, 옆집 담 너머 지붕까지 덮은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조금 망설이다 초인종을 눌렀다. 놀라신 선생님과 사모님은 서재에 이불을 깔아주셨고, 한 세 시간쯤 자고 일어나 살그머니 나왔다. 나오는 길에 흐트러져 있는 현관 신발들을 정리하고 현관문이 열리지 않도록 벽돌로 눌러놓았다. 새벽 5시에 궁금하여 나오신 선생님은, 텅 빈 방과 가지런한 현관 신발들을 보고 여명이 밝아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산문쓰기 2020.08.30

임강빈 선생님 유고시집 <나는 왜 눈물이 없을까> 발문

___임강빈 선생님 유고시집 '발문' 선생님의 유작을 묶으며 황희순 “내가 죽거든 발표 않고 버려둔 시를 유고시라고 내돌리면 절대 안 된다.” 선생님 떠나신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주기가 지나갔다. 생전에 여러 번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며 컴퓨터에 저장된 글들을 꺼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거 없애라니까 아직도 놔둔 거여?’ 선생님 음성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지만 지우지 못하고 더 깊이 숨겨놓았다. 지구상에서 나밖에 모르는 이 유작들을, Delete 키 몇 번만 누르면 사라질 선생님의 이 숨결들을, 정말 지워야 하나?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민했다. 고민하다가 나의 문우들과 선생님과 각별하였던 서정춘 시인 등에게 자문을 구했고, 제자인 평론가인 리헌석 씨에게 생전에 하신 말씀과 유작 이야기를 어렵게 ..

산문쓰기 2019.02.07

사바아사나

사바아사나 황희순 고통의 색깔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정신적 고통은 복잡하니 얘기하지 않기로 하고, 육신의 고통은 희한하게 시간이 지나면 잊는다. 여성들의 출산의 고통을 예로 들어도 그렇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그러했듯, 까마득 잊고 출산을 또 준비한다. 한때 나는 인체의 대들보인 허리를 앓은 적 있다. 어떤 기관이든 고장 나면 불편하지만 특히 허리는 조금만 아파도 일상생활이 불편해진다. 성석제는 소설 『인간적이다』에서, “인체에서 ‘리’자로 끝나는 대표적인 기관은 머리, 허리, 다리다. 머리는 하늘에 가깝고 다리는 땅에 닿아 있으니 이상과 현실, 계획과 실천,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은 다 머리와 다리 하기에 달렸다. 하지만 허리가 없으면 두 기관은 따로 놀 수밖에 없다.”고 했다. 20여..

산문쓰기 2018.04.25

임강빈 시인 영면

영영 익숙해지지 않을 이별  황희순  2016년 7월 15일기면嗜眠 상태의 따듯한 선생님 손을 내 맘대로 꼭 잡고, 선생님 덕분에 즐거운 적 많았다고, 詩를 놓지 않게 잡아주시고 늘 칭찬해 주시어 감사했다고, 다음 생엔 시인으로 살지 마시라고 작별인사를 했다.나는 “이 별에선 이별도 놀이”라고 시를 쓴 적 있다. 거짓말이다.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사는 내내 익숙해지지 않을 치명적인 독이다. 2016년 7월 16일오늘은 혹시 잠에서 깨어나실지도 몰라. 이유도 없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엇엔가 이끌리듯 서둘러 오후 1시 반쯤 병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가. 병실이 분주하고 선생님이 이상했다. 어제보다 눈을 더 꼭 감고 숨을 안 쉬고 계셨다. 위중하시다고 했다. 선생님 귀에 대고 조금 큰소리..

산문쓰기 2016.07.17

강물아, 어디로 가니

강물아, 어디로 가니 황희순 “인생이라는 강을 무난하게 떠내려갈 때는 주변 풍광만 바뀔 뿐 정작 자기는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에 낭떠러지, 즉 인생의 폭포가 나타난다. 이 폭포를 지나치면서 겪는 일은 기억 속에 깊이 새겨진다.” -(프리드리히 막스 밀러)에서 도도히 흐르는 강물에 풍덩, 파문을 일으키던 풍경을 끄집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10년이 지나도 아픈 일이 있는가 하면, 1~2년은 지나야 끄집어낼 수 있는 풍경도 있고, 죽을 때까지 괴롭힐 거 같은 사건도 있다. 어떤 풍경은 지분지분 물길을 막아 먼 길을 돌게 만들고, 즐거웠으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하여 나는, 뇌 속에 박힌 잡풀을 뽑아내듯 여태 살면서 모아두었던 사진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즐거웠거나 ..

산문쓰기 2015.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