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쓰기

임강빈 시인 영면

섬지기__황희순 2016. 7. 17. 00:14

 

 

영영 익숙해지지 않을 이별 

 

황희순

 

 

2016년 7월 15일

2016년 7월 15일 오후 5시 50분/선생님과의 마지막 악수

기면嗜眠 상태의 따듯한 선생님 손을 내 맘대로 꼭 잡고, 선생님 덕분에 즐거운 적 많았다고, 詩를 놓지 않게 잡아주시고 늘 칭찬해 주시어 감사했다고, 다음 생엔 시인으로 살지 마시라고 작별인사를 했다.
나는 “이 별에선 이별도 놀이”라고 시를 쓴 적 있다. 거짓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사는 내내 익숙해지지 않을 치명적인 독이다.

 2016년 7월 16일
오늘은 혹시 잠에서 깨어나실지도 몰라. 이유도 없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엇엔가 이끌리듯 서둘러 오후 1시 반쯤 병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가. 병실이 분주하고 선생님이 이상했다. 어제보다 눈을 더 꼭 감고 숨을 안 쉬고 계셨다. 위중하시다고 했다. 선생님 귀에 대고 조금 큰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저 왔어요. 황희순이 왔어요. 정신 좀 차려보세요.”
아, 그러나 20여 분 후 임종하시었다. 그만큼의 고통도 없이 어찌 이승을 하직하랴. 비교적 평안히 들숨을 멈추시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2016. 7. 16. 오후 2시 의사의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잔인한 인연이다. 부모님 임종도 지키지 못한 나를 왜 부르셨을까.
우린 살면서 얼마나 가족에게 얽매이나. 가족만큼 소중한 가족 밖의 인연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으셨던 걸까? 아님 당신의 生에 詩友가 가족만큼 중요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으셨던 걸까? 아님 이 모자란, 제멋대로인, 물가에 세워놓은 듯 아슬아슬한 나를 끝까지 걱정하셨나?
선생님 머리를 감싸안고 귓가에 대고 이제 진짜 영원한 작별인사를 했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잊지 않을게요. 선생님, 사랑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아직 온기 가시지 않은 선생님 손을 꼭 잡고 많이 울었다.내가 죽거든 발표 않고 버려둔 시를 유고시라고 내돌리면 절대 안 된다고 누차 당부하셨던 시인, 올곧은 시정신을 변치 않고 품은 채 60년을 풍미한 큰 별이 졌다. 30도를 넘기던 무더운 날씨가 웬일인지 조금 시원해졌다.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거나 부담을 주기 싫어하시던 성품대로 모두를 위해 이 좋은 주말에 초대형 사고를 치신 것이다.
썰렁한 빈소 구석에 혼자 앉아 소주에 눈물을 안주삼아 마셨다. 대전문인협회 회원 몇이 모여 시끌벅적 장례준비를 했다. 남의 나라 말 같아 귀를 닫았다.
진정한 시인은 다 어디로 갔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진정 시인인가?

2003년 8월 6일, 선생님 만나 소주 한잔 마시고 장난삼아 찍은 이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었다. 이런,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멋진 사진을 남겼을 텐데…….

시간을 거꾸로 돌려, 2016년 5월 9일
선생님 댁엘 갔다. 오랜만에 마주한 선생님 미소는 여전하셨고, 조금 더 야위셨지만 전보다 걷는 모습이 나아지신 듯했다.
예전에 선생님과 몇 번 갔던 동태찌개 잘하는 식당으로 외출을 감행, 지팡이와 내 손에 의지하여 몇 걸음 걷다 쉬고 또 쉬며 드디어 100여 미터 거리인 그곳에 도착했다.
정말정말 오랜만에 동태찌개와 소주를 한 병 시켰다. 얼마나 그립던 시간인가. 소주를 반잔 따라드리고 선생님이 따라주시는 소주잔을 들고 건배하며 나는 감동하고 있었다. 반잔을 드시더니 한잔 더 따르라 하시기에 안 된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셨다. 하여 반잔쯤 또 따라드렸다. 하여 합 한잔 반 정도는 드시고 나머지는 내가 홀짝홀짝 다 마셨다. 그게 선생님과 나눈 마지막 술잔이었다.
“야, 이제야 살 거 같다.”
선생님의 그 말씀은 또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인가. 그리고 돌아올 땐 어려워 큰며느님을 불러내 승용차를 탔다. 승용차를 기다리는 동안 찍은 사진이 선생님의 마지막 미소가 될 줄이야. 그날, 지금부터 천 일은 더 살 거 같다 하셨는데.....

2016년 5월 9일, 소주 한잔 하시고 내게 보낸 선생님의 마지막 미소

  2016년 7월 18일
영결식을 끝내고 꿈인 듯싶게 화장장(정수원)에 도착했다.
12시 20분, 화장이 끝났다는 소리가 마이크에서 흘러나왔다. 가슴이 쿵 내려앉은 바로 그때, 잠자리 한 마리가 내 앞에 주저앉았다. 하여 일으켜주려 손을 내밀었더니 내 손에 사뿐 올라앉아 날아가지 않았다. 이 무슨 일인가. 혹시 몸을 잃어버린 선생님께서 가까이 날고 있는 잠자리 날개를 잠시 빌어 내 손을 한 번 더 잡아주고 싶으셨나. 자꾸만 울려고 하는 내게 늘 하시던 대로 이렇게 말하고 싶으셨던 건 아닐까.
“어이고, 그래도 살아야지 워뜩할겨. 기운 내야지.”
귀에 쟁쟁한 선생님 목소리를 남기고 잠자리는 바로 사라져버렸다.

2016. 7. 18. 12시 23분

2016. 7. 18. 12시 27분

나는 1999년 선생님 덕분으로 <현대시학>에 재등단하며 2년여 절망에 찌들어 멈췄던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일년이 넘도록 ㄱ자도 안 쓰는 내게 "그래도 시를 써야지 뭐할겨." 하셨다. 그 말씀에 세뇌되어 시를 짚고 다시 일어섰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유일하게 정식으로 잡지에 추천한 시인은 황희순 단 1명뿐이라고 하셨다.(<현대시학>1999년 10월호/심사위원: 임강빈, 조영서) 그렇게 청빈하게, 누구에게도 청탁을 넣거나 립서비스를 하지 않는 분이셨다. 그후 선생님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면서 좋은 시를 쓰기 위해 정진했다. 지금까지 시를 놓지 않고 있는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선생님과 함께 찍은 사진은 몇 장 없다. 선생님의 육촌여동생이며 시인이신 세실리아 수녀님과 함께 2003년 10월 10일 박용래 시비 앞

수시로 내게 하시던 말씀, 사기에 나오는 경구와 선생님의 어록을 다시 새겨본다.
“도이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 복숭아와 오얏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 나무 밑에는 길이 저절로 생긴다.)”
“사과는 제 맛을 모르면서 익어간다. 시인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

“100편의 시를 쓰는 것보다 100명이 감동할 시 1편을 쓰는 게 진정한 시인이다.”

선생님 시집 <집 한 채>의 프로필에 쓰인, 내가 찍은 수많은 사진 중 가장 멋진 사진 __2006년 10월 30일 보문산 사정공원 박용래 시비 앞에서 막걸리 한잔 하고 나오는 길에 비둘기 뗴를 보고 즐거워하시는 모습.

“꽃은 말이 없다. 향기가 있다. 그 꽃을 보려고 사람들은 다투어 모여든다. 처음엔 오솔길이다가 나중엔 큰 길이 생긴다. 나도 그 길을 따라 나서지만 아직도 그 실체를 모른 채 첩첩산중을 헤매고 있는 꼴이다.”(임강빈 여덟 번째 시집 <비오는 날의 향기> ‘시인의 말’ 부분)
이제야 비로소 실체를 아시고 평안을 찾으셨으리라.
선생님의 명복을 두 손 모아 간절히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