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쓰기

자작시집 엿보기/<미끼>

섬지기__황희순 2013. 5. 12. 23:34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한 悲歌

     —<미끼>(종려나무, 2013.)

 

 

 

 

 

 

     황희순

 

 

 

   초겨울이었다. 삭발한 머리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금요장터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뒤에서 “황희순 씨!” 했다. 귀를 의심하며 무심코 멈칫했다. 한 발짝 떼자 또 “황희순 씨!” 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황희순이었다는 걸 누가 알아챈 걸까. 잠시 망설이다 뒤를 돌아봤다. 아, 거기! 서른 살 황희순이 서있었다. 버리고 싶었는데, 나를 잊고 싶었는데, 하여 삭발까지 했는데, 지난 기억을 하나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우린 조금 겸연쩍게, 조금 반갑게, 조금 싱겁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겨우내 서른 살 황희순을 앓았다.

 

 

   철없이 아이를 기르던, 아이를 기르다 몸을 잠근, 몸 잠근 열쇠를 잃어버린, 열쇠 찾아 하수구만 뒤지던, 매일 밤 겨드랑이에 날개를 그렸다 지우던, 폭식과 거식을 반복하던, 막차 놓치는 꿈만 꾸던, 울음과 웃음을 분간 못하던, 슬픔만 파먹던, 죽을힘 다해 찾은 열쇠로 몸을 열었던, 활짝 연 몸 착착 접어 장롱에 감추던, 장롱에 들어서야 비로소 숨을 고르던 서른 살 황희순이 20년을 한달음에 건너와 어깨를 툭 친다. 쉰 살의 적막을 흔들흔들 오가는 황희순이 비밀번호도 없이 열린다. 머리꼭지까지 고인 엄동의 바람이 피식 빠져나간다. 쭉정이 늙은 봄이 곧 또 올 것이다.

「갇힌 기억들」 전문

 

 

   “세상과의 모든 유대를 차단한 채 징그러운 슬픔과 상처를 온몸에 둘둘 말고 장롱 속으로, 무덤 속으로 유랑해 온 오십 세의 여자”(엄경희 해설)가 싫어 죽고 싶었다. 아이를 기르던 서른 살 황희순이 미치게 그리웠다. 이별과 상실에 뒤따르는 마음의 상태를 프로이드는 애도작업이라고 했다. 애도작업을 잘 해야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성숙된 사람이 될 수 있다는데, 나는 그 일을 잘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1997년 봄, 다 자란 아이를 잃고 시작된 나의 애도작업은 십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징그러운 슬픔의 덩어리를 그만 놓아버리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무엇이든 싹둑싹둑 잘라내거나 몸속에 욱여넣는 일이었다.

 

 

   고물장수도 주워가지 않는 시시한 詩나 끼적대며 수위를 조절했다. 바닥이 보일까봐 거울 안 본 지 오래, 어두운 쪽으로 목이 자꾸 길어졌다. 길어지는 목을 수시로 베어 詩 속에 욱여넣고 봉했다. 하여 사십 줄을 머리 없이 살았다. 다시 피돌기 시작한 이 머리는 새로 돋은 거다.

—「고백하자면」 부분·

 

 

   “독하고 모질어 나는 내가 못쓰게 된 줄 알았”(「날선, 혹은 낯선」)다. “죽었나 살았나, 왜 아프지 않은가.”(「통점」). 나는 나를 의심하며 관음증 환자처럼 저승을 기웃대고 있었다. 이젠 이 땅에 “더 이상 디딜 곳 없어 발을 잘라 몸속 깊이 숨”(「길의 배경」)기고 조금씩 둥그러지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사람이 새끼손가락을 떼어갔다 다음 사람이 귀를 떼어갔다 다음은 입을 떼어갔다 눈을 떼어갔다 코를 떼어갔다 다음은 팔을 다리를 떼어갔다 잔머리 굴린다며 머리를 떼어갔다 그 다음 사람이 달걀귀신처럼 둥그러진 여자를 버렸다 버려진 여자는 아무데나 굴러다니며 한자리에 머물지 못했다 굴러다니다 만난 또 한 사람이 아직도 몸이 따뜻하다며 가슴을 열고 심장을 떼어갔다 어디에 부려놓아도 깨질 일 없는 여자는 이제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미끼」 전문

 

 

   책 뒤 해설에 엄경희는 “슬픔을 버리기 위한 가학이 기괴한 귀신의 형상을 낳고 있”다고 했다.

   나는 정말 사람이기나 한 것인가?

 

 

   나를 사가세요. 부위별로 팝니다. 흐벅지진 않지만 오십여 년 숙성된 살이 말랑말랑할 거예요. 세상을 휘젓고 다닌 팔과 다리는 좀 싸게 팔아요. 엉덩이에 난 바람구멍은 살짝 도려내고 드세요. 가슴에 영영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만들지도 몰라요. 젖가슴과 허벅지는 할인되지 않아요. 입술은 혀를 끼워 팝니다. 혀 없는 입술은 좀 싱거울 테니까요. 갈비뼈 사이엔 아팠던 흔적이 사리처럼 끼어있을 거예요. 약이라 생각하고 꼭꼭 씹어 드세요. 간장은 다 녹아 못쓰게 됐을 거예요. 진창도 풍덩풍덩 밟았던 발과 아무나 덥석덥석 잡았던 손이 문제군요. 아랫도리를 통째로 사가면 손은 덤으로 드릴게요. 잠 안 오는 밤 혹시 위안이 될지 모르니까요. 발은 팔지 않을래요. 갈 곳이 있거든요. 꼭 한번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껍질은 살살 벗기세요. 입맛에 맞게 회를 뜨든지 탄력이 없다 싶으면 소금구이해 드세요. 뼈는 잘 고아 조금씩 마셔요. 뼛속 깊이 사무쳤던 일 많아 독이 있을지 몰라요. 아, 당신이군요. 어떤 부위를 잘라드릴까요.

—「부위별로 팔아요」 전문

 

 

   결국 나를 해체하여 부위별로 다 팔아치우고, “남이 보거나 말거나, 막다른 길이거나 말거나”(「늦었거나 늙었거나」) 마음 내키는 대로 가보기로 했다. 그 길에서, 청개구리의 “손톱만한 초록색 등에 노란 날개를 그려 넣”(「아무것도 아닌」)거나, “오백 년 전 사라졌을지도 모를 별, 하늘을 바라 그 흐린 별빛이나 물어뜯으며 컹컹 노니는”(「명자꽃 피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만났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불길한 조짐인가.

 

 

   종말이 온다 해도 우주를 말하자면 인간은 티끌만도 못할 터. 하지만 애인아, 우리 튀자. 46억 년 묵은 지구는 너무 지겹지 않은가. 종말이 오기 전에 푸른빛이 도는 젊은 별을 찾아 줄행랑치자. 40억 년 전 이미 우리 사랑은 삼엽충 DNA 속에 숨어 있었던 것. 그러니 애인아, 그 별에서 하루를 백년처럼 야금야금 파먹으며 한 만년 살자.

—「到彼岸」 부분

 

 

   시름시름 낡아가는 텅 빈 속에 꿈틀거리는 무엇이 감지되었던 것이다. 하여 죽기 살기로 용기를 내어 <미끼>를 던졌다. 쉿! 살아야 할 이유 한 점이라도 낚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지난 1월 저승 가신 엄마는 이제 이승인지 저승인지 헷갈리지 않겠다. 엄마의 몇 년 전 유서를 시 「여기가 어디일까요」에 써먹어 미안하다. 뜻도 모르는 딸의 시집을 머리맡에 두고 계시던 엄마, 새 시집이 나왔는데……, 엄마가 보고 싶다.

 

_____<시에> 2013.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