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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아닌 홀로 외 1편/정채원

홀로 아닌 홀로 정채원 얼음과 먼지투성이 행성이 돌고 있다고 보이저호를 타고 가도 10만 년 거리라고 내 주위를 돌고 있는 다른 별이 있다는 걸 나도 알 수 있지 홀로 있어도 자주 흔들리니까 이따금 뜨거운 흐느낌이 밀려오니까 익룡이라도 되어 쥐라기 때 그를 향해 출발했더라면 지금쯤 만났을지도 몰라 다른 별의 파편이 수없이 박혀 있는 그 별의 표면 온도는 영하 170도 두 팔 힘껏 벌려도 안을 수 없는 대부분의 아픈 별들은 다른 별을 돌고 있어 막막한 우주에서 홀로 있지 않아 오래 춥고 어지러운 밤이면 나도 누군가를 맴돌고 있지 얼어붙은 입김을 불어 내면서 그의 한숨과 눈썹 표정을 받아쓰기도 하면서 ================== 감염 정채원 치료 약도 백신도 없는 전염병처럼 사랑이 들끓어도 죽진 않았어..

북극형 인간 외 1편/정숙자

북극형 인간 정숙자 육체가 죽었을 때 가장 아까운 건 눈동자다 그 영롱함 그 무구함 그 다정함 이, 무참히 썩거나 재가 되어버린다 다음으로 아까운 건 뇌 아닐까 그 직관력 그 기억력 그 분별력 이, 가차 없이 꺾이고 묻히고 만다 (관절들은 또 얼마나 섬세하고 상냥했던가) 티끌만 한 잘못도 없을지라도 육신 한 덩어리 숨지는 찰나, 정지될 수밖에 없는 소기관들. 그런 게 곧 죽음인 거지. 비 첫눈 별 의 별 자 리 헤쳐모이는 바람까지도 이런 우리네 무덤 안팎을 위로하려고 철 따라 매스게임 벌이는지도 몰라. 사계절 너머 넘어 펼쳐지는 색깔과 율동 음향까지도 북극에 길든 순록들 모두 햇볕이 위협이 될 수도 있지 우리가 몸담은 어디라 한들 북극 아닌 곳 없을 테지만 그래도 우리 정녕 햇빛을, 봄을 기다리지. 죽을..

불행/박경리

불행 박경리 사람들이 가고 나면 언제나 신열이 난다 도끼로 장작 패듯 머리통은 빠개지고 갈라진다 사무치게 사람이 그리운데 순간순간 눈빛에서 배신을 보고 순간순간 손끝에서 욕심을 보고 순간순간 웃음에서 낯설음을 본다 해벽海壁에 부딪쳐 죽은 도요시의 넋이여 그리움이여 나의 불행 __박경리 시집 에서 __박경리 : 1926~2008. 통영 출생. 대하소설 (1969.~1994. 26년 만에 완성)

사랑의 한 연구__‘Luyten b’의 한때

사랑의 한 연구 __‘Luyten b’의 한때 황희순 나뭇가지에 앉아 틈 비집고 들어갈 듯 들어갈 듯, C가 바위를 노려보고 있다. 공중에서 사뿐 내려온 A가 C의 뿔을 쑥 뽑아 들고 우거진 수풀 속으로 총총 스며든다. 그늘에서만 자라는 뿔, 하루를 견디려면 뿔을 잘 키워야 해. 뿔이 양식이자 내비게이션인 이곳에선 날개 없이도 꿈틀꿈틀 날아다니지. A와 C가 옥신각신하는 사이 또 다른 A가 숲에 내려앉는다. 칼바람 몰려오는데 B가 보이지 않는다. 아픈 뿔을 훔켜쥐고 바이러스로 뒤덮인 지구를 궁금해하더니 어디로 간 것일까. 뿔을 주머니에 욱여넣은 또 다른 A가 코를 벌름대며 두리번거린다. B를 찾는 게 분명해. 서로를 야금야금 뜯어먹는 전희가 그리운 거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이 별에선 표독해져야 ..

詩쓰기 2022.04.18

쇼케이스 __2022 대선전(大選戰) 관람기

쇼케이스 __2022 대선전(大選戰) 관람기 황희순 조만간 벗어던질 터이니 가면이라 해두죠. 가면 쓴 이들이 뻥을 튀겨요. 말 한마디에 총천연색 뻥이 활활 부풀어 올라요. 식용불가 뻥이 문득문득 해와 달과 별을 가려요. 어둠은 절호의 기회라며 사람들 눈과 귀를 쥐락펴락해요. 색이 다른 왼손과 오른손이 내 손을 우격다짐 잡으려 해요. 빈말들이 난무하는 늪이에요. 존경존경, 나를 존경하지 말라니까요. 존경보다 존중이 더 필요하다는 걸 왜 모르나요. 낡은 레퍼토리에 양념을 쳐가며 허겁지겁 받아적는 저 패들은 또 어느 행성 끄나풀인가요. 가짜 꼬리가 가짜 날개를 물고 하늘을 누벼요. 동물원이 따로 없어요. 어머, 순정한 동물들을 폄훼했군요. 빛나는 가을밤, 가면을 빨아대던 날파리똥파리기생파리들은 모두 어디에 붙..

詩쓰기 2021.10.17

소정야경 외 1편/ 임문익

소정야경 임문익 나는 뜻을 하늘로 뻗쳤지만 육신은 땅에 남는구나 __케플러 물빛 그림자 속으로 느릿느릿 산마을이 가라앉고 작은 곰 한 마리도 내려앉는다 슬픈 영혼이 어릿거리는 자드락길 별똥별 하나 문득 흐른다 누구였던가, 별들은 죽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고 어두운 밤하늘에 찬연히 빛나는 별을 보고 길을 가던 때 나는 믿었었다, 별들은 영원하다고 별들도 고개 숙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지러진 달은 때늦게 뒤돌아본다 나지막이 저문 강에 잠겨 드는 작은 곰 무늬가 혹 내 전생이었을까 젊은 날의 난장판이 그리운 칼날에 저민다 선불 맞은 멧돼지 콧불을 뿜듯 상쇠의 제비돌기, 쇠잽이 꽹과리 소리가 아랫마을을 들어서 산마루로 옮겨놓는다 노루의 심장은 더워지고 산토끼는 서낭당 쪽달을 향해 무작정 뛰었다 노루의 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