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아닌 홀로
정채원
얼음과 먼지투성이 행성이 돌고 있다고
보이저호를 타고 가도 10만 년 거리라고
내 주위를 돌고 있는
다른 별이 있다는 걸 나도 알 수 있지
홀로 있어도
자주 흔들리니까
이따금 뜨거운 흐느낌이 밀려오니까
익룡이라도 되어 쥐라기 때
그를 향해 출발했더라면
지금쯤 만났을지도 몰라
다른 별의 파편이 수없이 박혀 있는
그 별의 표면 온도는 영하 170도
두 팔 힘껏 벌려도 안을 수 없는
대부분의 아픈 별들은 다른 별을 돌고 있어
막막한 우주에서
홀로 있지 않아
오래 춥고 어지러운 밤이면
나도 누군가를 맴돌고 있지
얼어붙은 입김을 불어 내면서
그의 한숨과 눈썹 표정을 받아쓰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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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
정채원
치료 약도 백신도 없는 전염병처럼
사랑이 들끓어도
죽진 않았어
아니, 죽은 사람이 없다는 건 아니지
숨도 쉬고 커피도 마시고 장사도 하지만
다만 열은 내렸지만
사태 이전보다
영혼의 눈이 십 리쯤 들어간 사람
오랜 세월 굳어진 돌덩이처럼
다시는 모래로 흩어지지 않으려는 눈빛을 가진
너를 읽고 난 후
밤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
다시는 강 건너로 돌아가지 못한다
참호도 대포도 없는 전장에서
나는 죽도록 달리다가 죽겠지만
아니,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이전과 이후 사이
꿈쩍 않는 강화유리 벽에 몸을 던지고
또 던지다 잠을 깰까
해열제에 취해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일상 속에서
정지 신호 지나
누군가 다가오면 멀리 돌아서 가는 길
*** 정채원 시집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에서
*** 정채원 시인 : 1996년 <문학사상> 등단/시집 『일교차로 만든 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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