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쓰기

새 시집 <미끼>

섬지기__황희순 2013. 3. 27. 11:42

네 번째 시집 <미끼> 출간

 

시인의 말______

 

   그가 나를 지웠다 나도 나를 지웠다 말끔히 지

워지지 않는 발은 모른체, 발의 상징부터 지웠다

흘린 발자국은 별이 되거나 새가 주워 먹거나

 

 

 

표제 시______


  미끼


  처음 만난 사람이 새끼손가락을 떼어갔다 다음 사람이 귀를 떼어갔다 다음은 입을 떼어갔다 눈을 떼어갔다 코를 떼어갔다 다음은 팔을 다리를 떼어갔다 잔머리 굴린다며 머리를 떼어갔다 그 다음 사람이 달걀귀신처럼 둥그러진 여자를 버렸다 버려진 여자는 아무데나 굴러다니며 한자리에 머물지 못했다 굴러다니다 만난 또 한 사람이 아직도 몸이 따뜻하다며 가슴을 열고 심장을 떼어갔다 어디에 부려놓아도 깨질 일 없는 여자는 이제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

 

     상실의 구멍 속으로 흘러드는 몽유의 세계

 

   세상과의 모든 유대를 차단한 채 징그러운 슬픔과 상처를 온몸에 둘둘 말고 장롱 속으로, 무덤 속으로 유랑해 온 오십 세의 여자. 그 세월의 무게에 스스로 질려 자신의 몸을 낱낱이 찢어발겨 놓고 팔아치운 여자. 품절된 여자. 완벽하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꿈꾸었던 여자. 황희순이 그려낸 오십 세의 여자는 이 같은 타나토스적 상상의 세계를 건너며 과연 진정으로 가벼워진 것일까? 시인은 “혓바늘을 족집게로 쏙 뽑아낸 후 퓨즈 나간 전등처럼 내 몸이 꺼졌다.”(「통점」)라고 쓰고 있다. 아픈 것을 뽑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암전된다. 무통증의 상태에서 그는 “나는 죽었나 살았나. 왜 아프지 않은가.”(「통점」)라고 되묻는다. 사라진 통증이 존재감의 상실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슬픔을 얼마나 철저하게 육화시켜 왔는가를 반증한다. 슬픔의 해체가 곧 존재의 해체라는 사실을 통해 그는 과거 기억과 슬픔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준다. 모든 슬픔을 잘라낸 후 ‘나’는 텅텅 빈 ‘無’로 환원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황희순 시의 맥락은 여기서 종결되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시 「길의 배경」에서 발견되는 “발을 숨긴 몸에 여러 갈래 길이 생겼다.”라는 구절이나 「부위별로 팔아요」에서 보이는 “발은 팔지 않을래요. 갈 곳이 있거든요. 꼭 한번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라고 한 부분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황희순 시에서 반복되는 죽음 충동과 외부로 향한 이 같은 조짐은 대단히 모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죽음 충동 이면에 그보다 더 강한 생명 충동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 생명 충동이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를 더 괴롭혔던 것이 아닐까? 죽어버리고 싶은데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자꾸 되살아날 때 삶은 더 힘겨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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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희순의 시는 우아함의 반대편에 놓인 한 존재의 형상에 주목한다. 그 존재는 정확히 오십 세의 여자이다. 오십에 이른 한 여자의 내면에는 그 세월의 무게만큼 무거운 기억의 퇴적층이 쌓여있다. 거기, 망각되지 않는 상실의 심연이 놓여있다. 상실의 우울을 거듭 우겨넣고 잘라내면서 그의 상상력은 때로 사납고 잔인하게, 때로 자학적으로 시의 언어를 휘몰아간다. 그러나 시의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시에서 자주 발견되는 ‘피’의 냄새가 서서히 깊은 슬픔으로 잦아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역겨움과 혐오감을 의도화했던 저간의 잔혹시와는 다른 생의 서사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가 근본적으로 의도했던 것은 공포나 잔혹의 묘사가 아니다. 그는 상실의 고통을 겪었던 오십 세 여자의 내면 풍경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 이 삶 속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기나 한 것인가, 내면의 슬픔과 기억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묻는다. 그 물음은 뜨겁고 절박하다. 온몸을 다해 자신의 존재성을 묻는 오십 세 여자! 그는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버린 채 불행한 존재의 진실에 닿고자 한다.
                

              __엄경희의 해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한 悲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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