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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황희순망설이다가하늘은 본디 유리창만 한 거라고 우기며 창밖만 치어다보며 몇 계절을 은둔한 적 있다. 사라지고 또 사라지는 구름, 구름은 다시 볼 수 없는 한 사람 얼굴만 자꾸 그렸다. 꿈에서도 내 편인 적 없던 하늘이 내 편이었다. 그때만큼은 나를 위해 매일 보고 싶은 그림을 그렸다. 나의 무얼 시험 중이었을까. 불행의 씨앗은 하나가 아니었다. 내 편이던 하늘이 변했다. 모든 불행은 애초 하늘이 내린 거라고 원망했다. 詩에 내려앉은 그 씨앗이 몸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그때부터 뾰쪽한 詩를 끊임없이 생산했다. 내가 생산한 詩에 내가 찔리며 젊은 피를 몽땅 낭비했다. 불행감 없이 어떻게 매일매일의 해거름참을 버텨낼 수 있었겠는가.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찾아 지금도 두리번거리고 있을 나를 이제 목덜미 잡아 ..

산문쓰기 2025.05.18

길 너머 길

길 너머 길 황희순 언양의 문필봉 아래 정토마을, 염불을 들으며 죽비소리에 맞춰 백팔배를 하고 있었다. 난생처음이라서 앞 사람을 보며 자세를 따라 했다. 육십여 명 중 이름 불릴 때까지였으니 108이라는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오십 번 정도 했을 무렵부터 4~5분 간격으로 한 명씩 부르기 시작했다. 요가를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 안 해본 자세라선지 허벅지가 뻐근했다. 그래도 죽음을 연습하러 왔으니 어떤 술수도 생각하면 안 될 터였다. 교육생 중 반 이상 불려 나갈 때까지 차례가 오지 않았다. 이른 저녁을 먹고 시작하여 한밤중이 되었으니 띄엄띄엄 빼먹으며 비틀비틀 절을 했더라도 백팔배를 두 세트는 했을 것이다. 대여섯 명 남았을 즈음 내 이름을 불렀다. 걸어가려 했으나 걸음이 걸어지질 않아 할 수..

산문쓰기 2025.05.12

어리석은 멜로

어리석은 멜로황희순기억이 우릴 지켜줄 거야행복을 지나치게 믿어선 안 돼서로를 모를 때 하는 질문은끔직한 무기가 될 수 있지다가올 일은 서서 기다리면 돼본능이 시키는 대로 항상 그래 왔어남자와 여자에게 벌어질 일은 결국불행해지는 것, 멋지지 않아?우연은 자주 찾아오지 않아살면서 만나는 많은 일들은 계속우릴 따라다닐 거야익숙한 저 중얼거림들엿들은 말, 실수로 뱉은 말까지도입술에 남아있을 거야불쾌한 웃음소리와 우릴 스친 손길도피부에 남아있을 거야우리가 만난 사람들이 전부기억 속에 살아있고게임이 끝난 후에도막무가내 매달려 있겠지이건 너무 어려워늙기를 기다리기엔 너무 지겹다고차라리 다시 죽는 게 낫겠어전부 다 너무 어려워*위 시는 영화 대사 재구성함.     기억이 우릴 지켜줄 거야행복을 지나치게 믿어선 안 돼..

詩쓰기 2025.02.13

에필로그

에필로그황희순너무 혼란스러워하지 마요오해받길 바라지 않잖아요바람은 술과 같은 거라서적당히 마시면 심장에 좋죠겨우 3일, 불장난한 거예요훌륭한 선수는 생각을 안 한대요대체로 사기꾼은 자신을 감춘다죠어느 것도 망치고 싶지 않아요백조이면서 오리처럼 살거나오리이면서 백조처럼 살거나도덕성이 결핍되었다는 건 아니에요행복과 모험은 같은 혈통이죠진심으로 모험을 원한다면기회를 꽉 잡아야 해요다시 시작이에요시작은 언제나 함정을 감추고 있어요기다리는 것도 꿈의 일부꿈이 어긋나더라도쿨하게 돌아서기, 그리고잊기*위 시는 영화 대사 재구성함.

詩쓰기 2025.02.13

블루블랙/황정산

블루블랙황정산 새까만 푸른 시절 월담을 하다고개 돌려 보았던 색초록을 칠했다가맞거나 손을 더럽힌 채벗어나고 싶었던그 단단한 출석부의 색끝없이 덧칠되어 사라지지 않는지우다 모두가 지워지는다들 쓰지만 쓴 적이 없는고개를 흔들어도하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도보이는 색가방을 멘 사람들이 벗지 않는 색오늘 내가 보고 있는 색나를 보는 색결국 내가 썼던글자들의 색모든 빛이 만들었다는 색그래서 색이 없는 색검고 슬픈그 색_____________________________*황정산 : 1958. 목포 출생. 1993년 평론, 2002년 시 발표. 저서 등.*황정산 시집 에서

개 같은 가을이_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최승자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매독 같은 가을.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한쪽 다리에 찾아온다.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