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신경림 낙타신경림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별과 달과 해와모래밖에 본 일 없는 낙타를 타고,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손 저어 대답하면서,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별과 달과 해와모래만 보고 살다가,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길동무 되어서.***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詩읽기·책읽기 2024.05.24
빛과 뱀과 나와 빛과 뱀과 나와 황희순 ◈ 어릴 때 이야기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는 뱀이 징그럽긴 해도 겁먹지 않았다. 물린 적 없고 물린 사람도 못 보았기 때문에 산길이나 신작로를 가다 뱀을 만나도 도망가지 않고 구경했다. 학교 오가는 길에 뱀이 나타나면 남자친구 중 하나가 돌을 던졌다. 그러면 여러 명이 돌멩이 하나씩만 던져도 예닐곱 방은 맞으니 죽기도 했다. 할머니는 이웃 아저씨가 잡아 가져다준 뱀을 허리 아픈 아버지에게 약으로 고아주곤 했다. 하여 친구들과 함께 돌을 던져 죽인 뱀을 막대기에 걸쳐 들고 집에 간 적도 있다. 이삼십 대가 옥신각신 지나가고 사십 대 초반에 우환이 덮쳐들었다. 현실이 꿈만 같았고 자각하지 못한 어떤 일로 천벌을 받은 건지, 견디기 힘든 나를 극도로 혐오했다. 사람으로 살고는.. 산문쓰기 2024.05.16
환상통 환상통 황희순 지난봄 거울 속으로 저승 가는 통로가 생겼다. 현관을 잠그려다 말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여자, 화마에 휩쓸려 간 남자를 이야기하며 거울을 밀고 들어간다. 저승에 한 발 이승에 한 발, 그녀의 봄이 꿈꾸고 있다. 꿈을 끝내야 계절이 지나간다. 잊히지 않는다고 조바심 낼 일 아니다. 가만히 살아만 있어도 기억은 쥐도 새도 모르게 흘러간다. 사라진 사람의 기억은 어디에 고일까. 모든 기억이 고인 곳은 아마도 생지옥일 거야. 기억이 흘러간 방향으로 그녀가 총총 사라진다. __ 2024. 봄 詩쓰기 2024.03.30
망설이는 바닥 망설이는 바닥 황희순 그 구렁은 바닥이 없어요 아무리 들여다봐도 보이지 않아요 계곡 끄트머리에서 울던 산개구리가 발소리에 놀라 폴짝 뛰었어요 말릴 새도 없이 구렁으로 사라졌어요 솔부엉이가 굼틀굼틀 일어서고 숲속 나무들이 일몰을 사이에 두고 아우성칠 때였어요 깊은 그곳에는 누가 살까요 산개구리를 보려고 아등바등 목을 길게 뺐어요 솔부엉이 같기도 하고 개구리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한 흐느낌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어요 세상 울음들은 대부분 왜 반음정인지 왜 따라 울게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요 어떤 손이 있어 산개구리를 사뿐 받았을까요 무사할까요 누구 사다리 없나요 망설일 시간 없어요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 봐야 해요 나도 같이 울어야겠어요 난파당한 4월이 몰려오고 있어요 __ 2023. 여름. 詩쓰기 2023.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