덫
황희순
망설이다가
하늘은 본디 유리창만 한 거라고 우기며 창밖만 치어다보며 몇 계절을 은둔한 적 있다. 사라지고 또 사라지는 구름, 구름은 다시 볼 수 없는 한 사람 얼굴만 자꾸 그렸다. 꿈에서도 내 편인 적 없던 하늘이 내 편이었다. 그때만큼은 나를 위해 매일 보고 싶은 그림을 그렸다. 나의 무얼 시험 중이었을까. 불행의 씨앗은 하나가 아니었다. 내 편이던 하늘이 변했다. 모든 불행은 애초 하늘이 내린 거라고 원망했다. 詩에 내려앉은 그 씨앗이 몸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그때부터 뾰쪽한 詩를 끊임없이 생산했다. 내가 생산한 詩에 내가 찔리며 젊은 피를 몽땅 낭비했다. 불행감 없이 어떻게 매일매일의 해거름참을 버텨낼 수 있었겠는가.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찾아 지금도 두리번거리고 있을 나를 이제 목덜미 잡아 주저앉히고 싶다. 누구도 시킨 적 없는데, 그만해도 되는데……. 오늘은 또 어디서 어둠을 견디며 기다리고 있을까. 다 늙은 봄밤이 깊어가고 있다. 나는 내가 그립다.
흔들리다가
새로울 것 없이 지루하게 반복된 길, 아픈 곳 없이도 늘 아팠다. 신경안정제를 빌어 잠든 밤은 얼마나 많았던가. 왜 사는지 알지 못한 채 여기까지 흘러왔다. 살기 싫으면 나를 꽁꽁 싸매며 자학했다. 자학하며 벽을 보고 앉아있으면 오래전 요가강의실에서 본 인체 해부 동영상 한 장면이 보이거나 낚싯바늘에 간신히 꿴 갯지렁이가 꿈틀거리기도 했다. 그뿐인가. 프리다칼로의 자화상 속 가시목걸이, 손바닥으로 압사시킨 바퀴벌레, 도로 위 피투성이이거나 납작하게 말라붙은 고양이 등 불편한 환영에 무시로 시달렸다. 머리맡에 내려앉은 먼지는 그렇게 사라져버린 젊은 나의 피이거나 몸을 통과한 시간일 것이다. 방귀신에 붙들린 듯 주저앉아 불편한 밑그림 위에 그 먼지 한 알씩 찍어 나는 나를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우고.
바라보다가
자작나무 눈을 들여다보면 말 걸고 싶어진다. 이 땅을 살다 간 눈동자가 자작나무가 되기도 하는 게 분명하다. 눈꼬리 쳐진 저 깊고 슬픈 눈, 무엇이 더 보고 싶었던 것일까. 환생한 그는 살아 파닥이는 이들과 눈을 맞추며 길고 긴 현생을 한자리에 서서 또 견딘다. 산길 오가는 숨결이 어디 사람뿐이겠는가. 새도 있고 멧돼지도 있고 이름 모를 뭇 생명이 쉼 없이 지나갈 것이다. 전생은 까맣게 잊고 그들과 눈 맞추며 그는 나날이 환해질 것이다. 누군가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도 생명은 빛이 난다. 감춰져 있던 바람이 눈을 뜨며 덤으로 살아가던 나도 잠시 흔들린다. 왜 사는지 글은 왜 쓰는지 왜 자꾸 한숨이 나오는 건지 처음부터 찬찬히 헤아려봐야겠다.
흘러가다
사르르 졸릴 때의 달콤함 맛본 지가 언제였더라. 잠 안 자고 살 수는 없을까. 며칠만 잘 자면 남루한 이 껍질 벗어버릴 수 있을지 몰라. 하룻밤만 푹 자도 날아오를 수 있을 텐데. 아하, 나는 나비가 될 수 없다. 새가 될 수 없다. 머리맡 눈높이 벽에 콩알만 한 점 하나를 찍어놓고 무시로 빠져나가는 연습을 한다. 죽기 전에 저 구멍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때로 그 구멍은 벽을 밀치고 툭 튀어나와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내가 빠져나가려는 구멍이 나를 빠져나가기도 한다. 읽다가 엎어놓은 책이 사그락사그락 소리를 낸다. 책갈피에 사는 이는 누굴까. 책꽂이 빈자리에도 먼지가 동그랗게 뭉쳐 있다. 집으려 하면 꼼틀거린다. 저것들은 흔적 없이 지워진 꿈이거나 기억일 거야. 애초에 어둠이던 꿈, 돌아가고 싶지 않은 젊은 날, 가지각색 꽃 피었다 진 어제, 흘러가다 멈춘 오늘, 꽃필까 봐 두려운 내일……. 이미 내 것 아닌 저 불행들을 콕콕 집어 깊은 밤하늘로 돌려보내야지. 사라지는 모든 것, 종국엔 이 몸도 먼지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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