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
황희순
소피보러 고추밭 고랑 깊숙이 숨어들어 갔어요. 워낙 급한 터라 염치불구 볼일을 보고 옷 추스르는데 어머, 마른 고춧대가 옆구리를 슬쩍 찌르는 겁니다. 돌아보니 탄저병 걸린 고추가 여기저기 애면글면 몸을 세우고 있었어요. 지그시 눌려있던 야성이 근질거리지 뭐예요. 아랫배에 고였던 피가 하르르 도는 찰나 고추밭 끄트머리 반백의 그가 한눈파는 나를 불렀어요. 고춧대를 분지르며 발길 돌리는데 비릿한 봄바람이 등을 툭 치며 다가오데요. 화악, 달떴지요 뭐.
--(시로여는세상, 2010.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