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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우리 동네는 정전이었다. 아니 온 나라가 어두웠다. 휴대폰을 통해 들려온 동료 시인의 화급한 목소리,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했답니다.” “예?" " 바위에서 투신했대요.” (…!…!) 순간적으로 만인 앞에 평등의 표상인 ‘법의 저울’이 떠올랐다. 그에게도 저울대는 수평을 유지했는가? 과오에 비해 중량초과의 압박을 올려놓지는 아니했는가? 신도 앞문을 닫을 땐 뒷문을 열어둔다 했거늘 사방문 처닫고 다그치진 아니했는가? 살인자의 얼굴도 인권이랍시고 가려주면서 그의 포토라인은 왜 서둘러 개방했는가? 그이보다 죄 없는 자가 돌 던졌는가? 그는 우리에게 진정 검은 대통령이었는가? 이런 날 정전이라니. 즉시 언니한테 전화 걸었다. 언니도 이미 황망한 목소리였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남편에게 상황을 전하자 며칠 전 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바꿔치기한 최신형 휴대폰으로 보아란 듯 텔레비전을 켰다. KBS1-TV. “노무현 대통령 사망”이라는 보도가 파도치고 메아리쳤다. ‘그의 인생의 절정은 청와대가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간 다음, 그 짧은 순간이 아니었을까. 대통령이면서도 온갖 질타에 시달렸던 그. 빈농에 태어나 꿈을 이룬 상징이기에 어려운 이들의 희망이었던 그. 그 겸손한 웃음을 어느 하늘 아래 다시 만나랴.’ 혼효 속에서 나는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ARS의 지시에 따라 번호를 눌렀다. 시청자 상담원이 나왔다. 상냥한 목소리의 여직원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짐승입니까? 이웃집 아저씨입니까? 왜 ‘서거’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사망’이라고 합니까? 제 의견이 반영되겠습니까? 담당자에게 속히 전달할 수 있습니까?” “네, 지금 전달하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언니한테도 그에 대한 전화를 넣었다. 여러 사람의 뜻이라야 효력이 발생할 것 같기에. 물론 언니도 공감했고 수 분 후 나에게 답전화가 왔다. 간결한 통화내용을 들려주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의 적이었습니까? 김일성이나 김정일이었습니까? ‘서거’라는 말을 놔두고 어찌 ‘사망’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까? 라고 했다고…. 노무현 대통령의 편을 들어서가 아닌, 언어가 바로 쓰이지 않은 데 대한 반향이었던 것이다. 오늘이 조선시대는 아니지만 그 옛날식으로 짚자면 노무현 대통령은 상왕이며, 그 상왕의 죽음이 자연사도 아닌 자살이라는 극한비극(極限悲劇) 아닌가 말이다. 조선시대라면 마땅히 ‘승하’라는 명사를 썼을 테지만 현대는 21세기이므로 ‘서거’라는 용어가 마침맞지 않은가. 그런 어휘를 밀쳐두고 ‘사망’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게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암튼 그때 그 출렁거리는 마음 한복판으로 내 궁금증을 배려한 언니의 전화가 재차 걸려왔다. “방금 ‘서거’로 고쳐졌다. 네가 전화한 지 5분 만에, 내가 전화한 지 3분 만에…….”
첫 강의). 2009년 5월 23일. 그날은 사실 내 개인사에서 퍽 의미 깊은 날이었다. 조병화 문학관의 ‘시 창작 강의’가 두어 달 전에 예약되어 있었던 것이다. 열세 살적부터 ‘시’에 실족하여 애면글면 살아온 위인이 쉰여덟이라는 초로에, 무려 45년을 거슬러 시 창작 강의에 임했으니 기쁨이나 보람보다는 눈물겨운 접점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날 정전이 된 것 자체가 수상한 전조였으나 노무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말미암아 긴장도 뒷전이요 종잡을 수 없는 슬픔이 마음을 지배했다. 다른 주제로는 두어 번 강의 경험이 있었지만 내 운명을 난도질한 ‘시’ 관련 테마로는 그날이 최초였으므로 왜 아니 뒤숭숭하였겠는가.
약속된 오후 두 시 반 평택에 닿기 위하여 12시 20분 버스를 탔다. 버스 천정에 매달린 텔레비전에서도 줄곧 속보를 내보내고 있었다. SBS-TV 화면 역시 극도로 우울했다. 나는 청력이 모자라므로 자막에 의지했다. 그런데 계속되는 문구인즉 “노무현 대통령 자살… 시민 충격”이었다. 나는 또 언니한테 전화를 걸어 “시민 충격”을 “전 국민 충격”으로 시정했으면 하고 바랐다. 내 휴대폰은 정전으로 인해 배터리 충전양이 부족했던 것이다. ‘엄청났을 혈흔은 왜 보여주지 않는 걸까? 경호관이 투신한 이를 들쳐 맸다니 왜 119로 연락하지 않았을까? 헬기라도 떴을 텐데 구조대원일지언정 봐선 안 될 뭔가가 있었던 걸까?’
‘경호관의 임무부실을 왜 문책하지 않는 것일까? 담당의사의 수습경위가 왜 알려지지 않는 것일까?’ 언니로부터 곧 답전화가 왔다. 담당기자와 직접 통화했는데 “시민이나 전 국민이나 그게 그거 아니에요?” 하더라는 것. “어떻게 같은 말일 수 있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가 서울시민만의 충격입니까? 봉하시민만의 충격입니까? 외신들까지 충격 보도를 하고 있는데 어찌 전 국민의 충격이라고 아니한단 말입니까?”라고 했다고. 하여 언니는 언니의 친구들에게 전파, 동시다발적으로 방송사에 제안했으나 바뀌지 않았으며 삼십여 분 후 “시민들 충격”이라고 ‘들’자 하나가 더 붙었다는 소식을 내게 실시간으로 전해줬다.
터미널에 마중 나온 시인의 승용차를 타고 조병화 문학관 강의실에 들어섰다. 「정숙자 시인의 시와 인생/그리고 미당 서정주」라고 새긴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감동과 감사가 빠른 속도로 뇌천에 저장되었다. 하지만 사적인 감동이나 감상으로 시간을 축내선 안 되었기에 이내 준비한 페이퍼를 펴고 횡야설수야설에 들어갔다. 서정주의 마지막 추천자라는 인연으로 미당을 수업하는 기간 중 초청되었던 나. 한즉 나는 미당의 친필 붓글씨와 내 나이 열셋에 만들었던 자필 시문집 등을 공개했다. 미당이 내게 걸었던 믿음과 격려의 진원지가 다름 아닌 ‘간절성’에 있었음을 최근에야 깨달았다고 진정어린 고백도 했다.
호올로 가신 님아). 2009년 5월 27일. 서거 5일째. “언니, 대한문 앞에는 조문객이 너무 많으니 ‘강남’ 역으로 갈까?” “아니지, 힘들더라도 대한문 쪽으로 가는 게 진심으로 애도와 성의를 바치는 일이야.” 결국 언니와 나는 17시 30분에 전철역 ‘동작’에서 만나 덕수궁을 향했다. 아픈 허리와 무릎으로 세 시간이나 줄서서 기다렸다가 국화꽃을 바친 언니와 나는 자정 무렵에야 돌아왔다. 덕수궁 뜰에 분향소를 차렸다면 작히나 좋으랴만 무심한 궁궐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길섶 분향소의 조문객과 행인들이 엉키지 않도록 자원봉사자들이 애쓰고 있었다. 서울광장도 봉쇄되어 정동극장 부근 길거리에서 추모제가 행해진 그날. 나도 준비해온 편지를 덕수궁 돌담에 붙였다. 영전에 올리려고 쓴 글이었으나 남들과 같은 방법을 취했고 동봉했던 향전은 모금함에 넣었다. “귀촉도-서정주-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 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ㅅ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전문-
그리고 그 시 아래쪽에 “고 노무현 대통령님께// 삼가 옷깃을 여미고 명복을 빕니다. 마음의 말이란 본래 다하지 못하는 법…. 정치에 대해 아는 바 없으면서도 저는 한때 뒷전에서 당신을 욕한 적 있습니다. 이제 느닷없이 당신을 여의고 보니, 지난날 저의 그 욕 한 자락도 당신 목숨을 베는 데 한 이빨이, 전기톱의 한 이빨이 되지 않았을까 뉘우쳐집니다. 그 순한 웃음과 말씨와 모습을 다시 뵈올 수 없다니 눈물만이 진언을 대신할 따름입니다. 퇴임 후 고향에 내려가 사시던 당신 모습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자 우리의 긍지이고 꿈이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먼 저승길 부디 안녕히….
귀향 461일 만에 눈감은 그는 아직 많은 꽃봉오리를 매달고 웃던 박애주의자였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전기톱이 밑동을 잘라버렸다. 자신에게 톱날을 들이댄, 자신이 아낀 나라를 향해 일언반구 변명하지 않았던 그. 임기 중 탄핵논란 때마저 타인을 억압하지 않았던 그. “저를 버리십시오.” 나는 그의 유서를 믿기보다 저 말씀을 기억하련다. 그는 빈부귀천 없이 우리 모두를 위해 스쳐간 바람이었다. 오호통재라, 내 덕이 얇으니 어찌 그가 마하살(摩訶薩:대성인)임을 알아볼 수 있었으리요. 그렇지만 이제라도 깊이 깨달아 우리 국적의 보살 한 분을 모시게 되었으니 무현보살마하살! 나는 그 따뜻한 관음전에 합장하리라. ▩
*법률저널공무원 181호 <정숙자 시인의 잉크-18>2009.6.22 *법률저널 제538호 (정숙자 시인의 잉크-18)/ 2009.7.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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