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기억
--흉터
어느 시인이 운동모자를 눌러쓰고 나타났다
내게 귓속말로 머리를 빡빡 문질렀다고 했다
왜냐고는 묻지 않았다
한참 만에 모자를 벗어 머리통을 보여주었다
잘생긴 두상 여기저기 흉터 몇 개 박혀 있다
겨울 숲처럼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짐승의 발톱에 할퀸 자국
예리한 낫에 잘려나간 자국
산불에 그을린 자국
사람에게도 겨울산의 아픈 흔적이 보일 때가 있다
겨울나무처럼 정직한 그녀의 몸이 울고 있다
--상처를 잘라내려다 상처를 불러냈어요--
날 저물어
몇 잔 술에 취해 그녀가 눈밭을 뒹굴고 있다
왼손으로 녹슨 대못을 뽑아내고 있다
오른손으론 몸에 박힌 흉터를 쓰다듬고 있다
헐벗은 나무등걸을 덮어주고 있는
계룡산 저녁 눈발
눈 속에 감싸안은 그녀의 뒤통수가
적멸보궁이다
개다리춤
이명수
개운산 재개발지구 한쪽 귀퉁이 빈 터,
아이들이 개다리춤을 추고 있다.
포크레인 소리 잠시 멈추고,
장마철 햇살 비집고 살금살금 키가 크는 아이들.
아이들아 모여라, 개다리춤 추자.
천 원짜리 한 장 내걸고 춤 시합을 붙였다.
흔들다 지쳐 다리 사이로 엉금엉금 기는 놈도 있다.
누워서 두 다리를 하늘에 대고 부르르 떠는 놈도 있다.
나도 다리가 부르르 떨렸다.
줄기째 뽑혀 나와 털어내려 해도 올망졸망 매달려
허공에서 개다리춤을 추는 어린것들.
노랑머리 점박이 네가 최고야,
천 원을 상금으로 건네주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나도 아이들 틈에 끼어 털레털레 개다리춤을 추었다.
한 아이가 다가와 내게 동전 한 닢을 내민다.
조막손만한 7월 햇살에 빛나는 은화.
이런 상을 받은 게 얼마 만인가.
아직은 풀꽃들이 지키고 있는 재개발지구 한쪽 귀퉁이,
이 땅에 두 발로 버티어 서 몸을 흔들어봐.
언덕을 내려오며 열심히 열심히 개다리춤 연습을 했다.
동전 한 닢 손에 꼭 쥐고 온몸 부르르 떨며
--이명수 시집 <울지 좋은 곳을 안다>에서
이명수
*1945년 경기도 고양 출생
*1975년 <심상> 등단
*시집 <공한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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