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
김선근
갈라져 아름다운 것을 보았지요
해를 짊어지고 밭이랑 속에서 사신
엄니의 손등처럼
물결에 갈라진 수천 조각 빛들
이마에 흐르던 땀방울처럼 반짝여요
엄니의 가슴에 콕콕 못을 박듯
모래밭에 발자국을 새겼지요
자식 허물을 숨기듯 파도는
발자국을 지우며 연신 너스레 떨어요
거친 손 행여 자식 기죽일세라
수세미로 닦아대던 엄니는 바다가 된 것일까요
발목을 쓰다듬는 파도가
엄니의 손바닥처럼 거칠거칠해요
수평선에 널어놓은 넋두리를
담쏙담쏙 걷어가요
평생 짊어졌던 해를
이제야 내려놓으셨나요, 엄니
참 붉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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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
김선근
삼복더위, 축축 늘어지는 한낮
망가진 우산 하나
죽어서도 꼿꼿하네요
거친 하늘 받아내던 그가
중심 한번 내어준 적 없는 그가
시든 풀밭에 버려져 있네요
작은 걸림에도 쉬이 등 돌리는
타협이 난무하는 세상 한가운데
꼿꼿이 서있어 본 적 있나요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던 그가
지켜야 할 게 있는 거라며
붉은 녹에 휩싸여 삭아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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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산의 봄
김선근
엄마! 머구랑 매실액이랑 뭐라카드라, 섞어 먹으믄 죽을 때까지
중풍에 안 걸린단다.
야야, 니이 그거 절대 묵지 마라, 알았제? 그거 먹어믄 죽는갑다.
산 늠이 우에 병에 안 걸리노, 죽어야 안 걸리제.
아파야 사람이제, 안 아프믄 오데 사람이가. 사람은 아파야 죽는
기라. 안 아픈데 우에 죽겠노.
어머니 안 계신 시골집 돌담 아래, 아이 손바닥만 한 머위 돋았다.
*중구산 : 필자의 고향 동네. ‘중괴산’을 고향에서는 ‘중구산’으로 부름. 문경군 가은읍 하괴2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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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이 죽다
김선근
가망이 없다며 그들은 노모를 안방에 뉘어놓고 눈 속을 서둘러
떠났다 노부는 노모의 자글거리는 엉덩이 똥을 닦으며 울었다 노
모는 눈을 뜨지 않았다
한겨울이었다 발목까지 눈이 잠겼다 올가미에 걸린 고라니처럼
나는 울었다 노부는 두어 걸음 뒤따라오며 울었다 까마귀도 울었
다 귀를 막고 혀를 뽑아 눈[雪] 속에 묻었다 그리고 다시는 울지
않았다 봄이 와도 눈은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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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근 시집 『울음이 죽다』 표4
오래 방황하던 김선근 詩人이 드디어 “무릎 사이 오래 품었던/천 근 같은 닻을 걷어 올리”(「어떤 항해」)고 본격적인 항해를 시작했다. 조금 늦었지만 배를 띄웠으니 끝까지 가야 되지 않겠는가. 첫 항해에 그는 저릿저릿한 가족사를 담담히 풀어놓았다. 다음엔 무엇으로 독자의 가슴을 흔들어놓을 것인가. “혹시나 혹시나, 매일매일 세상에/미끼를 던져놓”(「혹시나, 詩」)고 고민할 詩人이 안타깝기는 해도, 기왕 詩의 바다에 닻을 올렸으니 어쩔 것인가. 험한 그 길은 “잡힐 듯 잡힐 듯, 아무리 돌고 돌아도/흙먼지만 일”(「꼬리잡기놀이」) 수도 있고, “헛챔질에 놀란 물고기”처럼 더 깊이 숨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하고 싶은 이야기는 기어이 끄집어내고야 말 것이다. 맘에 드는 詩 한 편 빚어내는 일이 월척 한 수 낚는 일만 못할 리 없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詩人의 길, 부디 지치지 않길 바란다.
__황희순
*** 김선근 시집 『울음이 죽다』(2017. 북인)에서
*** 김선근 시인 : 1968년 문경 출생/ 2007년 <현대시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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