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점묘도
황희순
1월, 辨
겨울이 겨울답지 않아서 그가 그답지 않아서 삭발했다 방바닥에 엎드려 바리깡으로 깨끗이 밀었다 그 후 며칠째 자연암 풍경이 내려와 가르랑가르랑 명치를 건드린다, 너도너답지않아 너도너답지않아
2월, 困
약항아리 손에 든 덕주사 약사여래불이 인간의 아픈 곳을 대신 앓고 있다 머리 아픈 이에겐 이마를 다리 아픈 이에게는 무릎을 한 점씩 허물어 내어주고 있다 나도 깊이 파인 그의 가슴을 검지로 꾹 찍어 먹어본 적 있다
3월, 癡
만약에, 만약에 말인데, 나의 도플갱어가 나타난다면, 낯선 길에서 친구 만나면 몰라보듯, 누구지? 어디서 봤더라? 그러겠다 나는 나를 자세히 본 적 없으므로, 잘 알지 못하므로
4월, 假
한뼘 한뼘, 시는 이렇게 쓰는 거야 발 헛디딘 자벌레 벚나무에 매달려 시를 쓰고 있다 잘난 척하던 시인 말똥이 뒤통수 한대 맞은 거라, 사람보다 개가 호강하는 개같은 세상에 그의 뒤통수 누가 때렸는지 모른다 몰라
5월, 寂
달리다 넘어질 뻔한 아이를 붙잡아 세우고 몇 살이냐고 물었다 손가락 네 개를 펴보인다 수어를 주고받던 아이 부모가 머리를 깊이 숙인다 잠시도 아이에게 눈을 떼지 않는 어미 눈이 길이다 다시 태어나고 싶은 고요한 봄
6월, 描
안드로메다은하가 우리은하 쪽으로 시속 360,000㎞로 끌려와 50억 년 후엔 합쳐질 거란다 그즈음 태양계는 우주 먼지로 흩어진 뒤일 터, 시속 1,699㎞로 자전하는 지구를 시속 3㎞로 걷고 있는 개미보다 조금 큰 벌레, 지금 나는
7월, 貪
詩 속에 오래 숨어있었다 숨바꼭질도 싱거워졌다 오래 버려둔 말들이 정수리까지 고여 썩는 중이다 어디로 가야 하나 냄새 풍기는 나를 툭 엎질러줄 누구 없을까
8월, 非
이백 원 더 내요, 둘이 천원 냈으먼 됐지 뭘 그래유, 으른은 천이백 원여요, 키가 짝으니께 쪼꼼만 내두 되잖유, 짝어도 으른이잖어요 으른, 읎이유, 증말 미치겄네//열 살쯤 된 사내아이를 앞세운 척추장애인 아비와 버스기사가 실랑이한다 지갑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차창을 빼꼼 열었다 정말 미칠 것 같은 염천바람이 숨을 훅 틀어막는다
9월, 像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어디서 서성이다 발길 돌리는지, 서성이다 사라지는 사람을 왜 바람이라 하는지, 흔한 바람을 왜 사랑이라 하는지, 바람과 사람과 사랑이 왜 한통속인지, 반백년을 살고 더 살다보면 조금 알 수 있지
10월, 哀
말에 찔려 덧난 상처 딱지 겨우 앉았다 꾹꾹 눌러도 아프지 않다 아픈 기억만 남았다 딱지를 확 잡아 뜯었다 환히 피어나는 한 줄기 빛, 몸에 꽃잎 하나 또 늘었다
11월, 爲
그가 잘 가라고 하면 달콤했다 하여 나도 잘을 잘 썼다 입천장에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혀 위로 잘이 초콜릿처럼 녹아내렸다 어느 날 잘 가라고 했더니 그가 영영 가버렸다 이제 잘을 잘 쓰지 않는다 잘 쓰지 않고도 잘 산다
12월, 囚
방에서만 두 계절을 지내며 우리에 갇혔다고 생각했다 밖에 나와 보니 집 밖이 우리다 다시 개구멍 하나 없는 우리에 갇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