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詩 비평

<해설> 시집 <미끼>__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한 悲歌/엄경희(문학평론가)

섬지기__황희순 2015. 12. 22. 19:05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한 悲歌

 

엄경희(문학평론가, 숭실대 교수)

 

 

하여 사십 줄을 머리 없이 살았다. 다시 피돌기 시작한 이 머리는 새로 돋은 거다.

―「고백하자면」 중에서

 

 

1. 오십 세, 그리고 여자

 

물리적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일지 모르지만 때로 그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성을 의식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점이 되기도 한다. 자신을 망각했던 ‘나’는 문득 존재 상태를 가늠하게 하는 ‘나이’를 떠올리며 자신 앞으로 되돌아온다. 희미했던 자신의 존재성이 또렷이 각인되는 순간은 얼마나 두렵고 불행한가. 그러나 다른 무엇이 아닌 ‘나’ 자신이 문제적인 것이 되었을 때 인간은 얼마나 진실한가. 황희순의 네 번째 시집 ?미끼?는 오십에 이른 한 여성 화자의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십 세, 그리고 여자라니! 매력도 긴장도 젊음도 다 탕진한, 그럼에도 달관과 무심(無心)은 아직 이른 이 주름진 나이의 여성을 누가 읽을 것인가. 아무도 흥미를 갖지 않는, 아니 흥미를 끌 수도 없는 오십 세의 여자를 시인은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이 여자의 목소리는 거칠고 사납고 자애롭고 처연하다. 모든 것을 상실했으며 상실한 그 모든 것을 몸속에 우겨넣고 있는 여자, 아직도 피를 보아야 반짝이는 여자, 반백 년 묵은 몸으로 저승을 기웃대는 여자, 모서리가 다 닳아버린 여자, 텅텅 빈 여자, 찢어발긴 봄밤의 여자, 징그러운 여자, 웃음과 울음을 분간하지 못하는 여자, 몽유하는 여자, 그런 자기를 위해 백팔 배를 올리는 여자.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철없이 아이를 기르던, 아이를 기르다 몸을 잠근, 몸 잠근 열쇠를 잃어버린, 열쇠 찾아 하수구만 뒤지던, 매일 밤 겨드랑이에 날개를 그렸다 지우던, 폭식과 거식을 반복하던, 막차 놓치는 꿈만 꾸던, 울음과 웃음을 분간 못하던, 슬픔만 파먹던, 죽을힘 다해 찾은 열쇠로 몸을 열었던, 활짝 연 몸 착착 접어 장롱에 감추던, 장롱에 들어서야 비로소 숨을 고르던 서른 살 황희순이 20년을 한달음에 건너와 어깨를 툭 친다. 쉰 살의 적막을 흔들흔들 오가는 황희순이 비밀번호도 없이 열린다. 머리꼭지까지 고인 엄동의 바람이 피식 빠져나간다. 쭉정이 늙은 봄이 곧 또 올 것이다.

―「갇힌 기억들」 전문

 

나이 듦이란 시간의 퇴적층을 만들면서 동시에 퇴적된 시간의 양만큼 소모된 생명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존재는 시간의 변이에 따라 그 질을 달리한다. 여기에 관여하는 것은 비단 육체적 변화나 상황적 변화만이 아니다. 한 존재는 언제나 기억의 퇴적층을 몸속에 간직한 채 시간의 변이를 체감하는 것이다. 기억은 한 존재가 겪었던 상이한 개별 사건을 하나의 통일체로 묶어놓는다는 점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모든 순간을 ‘나’로 종합․회귀하게 하는 존재의 근원적 맨틀이라 할 수 있다. ‘나’를 ‘나’로서 지탱하게 하는 기억은 그러나 때로 무거운 고통의 다발이 되어 현존하는 존재의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기도 한다. 이 시에서 서른 살의 황희순을 기억하는 쉰 살의 황희순은, 아니 쉰 살에 이른 황희순의 어깨를 툭 치는 과거 서른 살의 황희순은, 더 정확히 말해 이 둘은 모두 한 존재의 내면에서 분리될 수 없는 ‘나’의 현존성을 나타낸다.

이 시에 드러난 화자의 현존성은 ‘열다’와 ‘잠그다’라는 반복성에 의해 형성된다. ‘열다’의 계열축에는 아이를 낳다, 날개를 그리다, 열쇠를 찾다 등이, ‘잠그다’의 계열축에는 열쇠를 잃다, 막차를 놓치다, 슬픔을 퍼먹다 등이 시의 맥락으로 교직된다. 그런데 이 시는 이러한 대립적 의미망의 단순한 교직에서 끝나지 않는다. 주목할 것은 “활짝 연 몸 착착 접어 장롱에 감추던, 장롱에 들어서야 비로소 숨을 고르던 서른 살 황희순”이라는 대목이다. 활짝 연 몸을 다시 장롱에 감춘다는 점에서 열고 감추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숨김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는 완전한 고통의 해소가 아니라 일종의 ‘정돈’ 혹은 ‘은폐’의 심리를 함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장롱 속에 정리된 채 은폐되어 있는 고통의 뿌리를 그는 혼자서 열어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다른 시 「고백하자면」에서 시인은 “서른 갓 넘긴 그때부터 나는 낡아가기 시작했다.”라고 고백한다. 서른 이후부터 지속되었던 ‘열다’와 ‘잠그다’의 사투 속에서 그는 존재의 낡음을 인식했던 것이다.

다시 시 「갇힌 기억들」의 맥락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롱 속에서의 숨고르기는 폭식과 거식, 웃음과 울음을 분간하기 시작한 것과 맞물린다. 이러한 분간은 다시 고통의 외향성을 장롱 안의 내향성으로 더욱 다져넣어야 한다는 자기 다짐으로의 진화와 맞물린다. 화자 황희순은 자신의 과거 이십 년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거 이십 년의 기억은 쉰 살의 황희순을 흔들흔들 열어놓는다. 그 순간 화자는 “머리꼭지까지 고인 엄동의 바람이 피식 빠져나간다.”라고 말한다. 장롱 속에 고인 냉기의 슬픔이 쉰 살의 황희순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쭉정이 늙은 봄”의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존재의 무거움을 짊어지고 그는 “쉰내 나는 오십대를 코를 틀어막고 건너는 중”(「건망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죽었나 살았나, 왜 아프지 않은가”(「통점」), “내가 나를 잊은 건 아닐까”(「늦었거나 늙었거나」), “나는 꽃일까요, 똥일까요.”(「꽃=똥」)라고 자문한다. 이와 같은 물음 이면에는 깊고 깊은 상실감이 놓여있다.

 

처음 만난 사람이 새끼손가락을 떼어갔다 다음 사람이 귀를 떼어갔다 다음은 입을 떼어갔다 눈을 떼어갔다 코를 떼어갔다 다음은 팔을 다리를 떼어갔다 잔머리 굴린다며 머리를 떼어갔다 그 다음 사람이 달걀귀신처럼 둥그러진 여자를 버렸다 버려진 여자는 아무데나 굴러다니며 한자리에 머물지 못했다 굴러다니다 만난 또 한 사람이 아직도 몸이 따뜻하다며 가슴을 열고 심장을 떼어갔다 어디에 부려놓아도 깨질 일 없는 여자는 이제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미끼」 전문

 

이 시집의 표제이기도 한 「미끼」는 황희순이 말하는 오십 세 여자의 내면 풍경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떼어갔다’라는 서술어가 반복되는 가운데 이 시에 등장하는 여자의 신체는 새끼손가락과 귀, 입, 눈, 코, 팔다리, 머리를 잃어버린 형상으로 그려진다. 신체 형상의 변화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의 상실로 진행되고 있음을 볼 때 상실의 진행이 곧 상실의 증폭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으며 이때 독자는 ‘떼어갔다’라는 반복행위에 가학성이 묻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목구비와 사지를 잃은 여자의 형상은 마침내 “달걀귀신처럼 둥그러진 여자”로 표현된다. 존재의 비참은 그 다음부터 시작된다. 추하게 훼손된, 기괴한 여자의 몸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데나 굴러다닌다. 이 둥근 알(공) 모양의 이미지는 외부로 향한 몸의 돌기들이 모두 제거된 폐쇄된 몸을 상징한다. 이제 고통과 고독은 오로지 안으로만 굴절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데나 굴러다니며 한 자리에 머물지 못했다”는 구절에는 쓸모없음이라는 존재 비하와 든든한 정착지에 안착할 수 없는 존재 상황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여기에는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없다는 절망과 스스로 자신을 버리고 싶은 욕망 또한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에 드러나는 참혹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화자는 “굴러다니다 만난 또 한 사람이 아직도 몸이 따뜻하다며 가슴을 열고 심장을 떼어갔다”라고 진술한다. 상실은 세상 밖으로 뻗어 있는 몸의 돌기를 넘어서 몸의 내부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이 시는 한 여자의 존재성이 완벽한 사물성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한 존재가 어떻게 존엄성을 잃고 무가치한 것이 될 수 있는가를 드러낸다. “어디에 부려놓아도 깨질 일 없는 여자는 이제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에 표현된 ‘부려놓다’는 ‘굴러다니다’와 달리 자발적 운동성이 전혀 없는 사물화의 극치를 암시한다. 그녀는 이제 단단하게 뭉쳐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비생명체가 된 것이다. ‘미끼’라는 이 시의 제목이 이를 함축한다. 깨질 일 없는 사물의 견고함으로 변화된 존재, 그녀에게는 외부도 내부도 없는 것이 아닌가. 내부가 없으니 슬픔도 기쁨도 더 이상 그녀를 파고들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황희순이 말하는 극한에 이른 존재의 비극이다. 이와 같은 존재 인식은 또 다른 시 「빈칸」에도 나타난다. “오래된 꽃술은/밤에만 피어난다//버려도 그만인 그것은/ 각각의 몫을 뺀 나머지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버려도 그만인, 모든 것을 다 빼 낸 ‘꽃’은 술이 되어 가면서 텅 빈 존재로 남는다. 이처럼 텅 빈 존재의 결핍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마지막 남아있는 슬픔의 잔여를 모조리 버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피맛을 본 쥐가 갯바위 틈새를 들락거린다

내 살[肉] 같던 시들어버린 너를 한 잎씩 떼어

쥐에게 던져준다

흡흡, 피 비린내가 진동한다

눈 부라린 파도가 미친 듯 방파제를 때린다

쥐에게 너를 다 내주고 나서야

멈추었던 초침이 다시 움직인다

―「안녕, 무창포」 부분

 

이 시의 화자는 “내 살[肉] 같던 시들어버린 너”를 쥐에게 떼어준다. 문장의 의미를 짚어보면 시들어버린 ‘너’는 ‘내 살(肉)’과 동급이라 할 수 있다. 화자는 비루한 쥐들에게 ‘나’나 다름없는 ‘너’의 살을 던져줌으로써 자신으로부터 ‘너’를 분리시킨다. 애착했던 대상과의 분리를 스스로 강제한다는 점에서 이는 일종의 애도작업이라 할 수 있다. 황희순의 다른 시에 보이는 “아이가 간 지 십 년이 더 지났다//놓아야지, 이젠 정말 보내줘야지”(「놓다」), “버리고 말았다, 버리고 점점/모서리가 닳아, 밤낮없이 닳아//둥근 달이 되었다/무릎이 어딘지 심장이 어딘지 아주 잊었다”(「비창」)와 같은 구절은 모두 이러한 애도작업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읽힌다. 애도작업 가운데 몸의 모서리가 닳아 둥글어졌다면 앞서 보았던 시 「미끼」에 등장한 ‘여자’의 “달걀귀신처럼 둥그러진” 몸 또한 이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을 버리기 위한 가학이 기괴한 귀신의 형상을 낳고 있음이리라. 인용한 「안녕, 무창포」의 “눈 부라린 파도가 미친 듯 방파제를 때린다”라는 표현에는 이러한 애도작업이 휘몰아오는 지극한 슬픔이 내포되어 있다. 시인은 미친 울음을 파도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행에 보이는 초침의 움직임은 애도작업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너’를 남김없이 쥐에게 내주고 난 후 정지되었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너’에 대한 애착과 슬픔이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깨끗하게 지워진 것일까? 여기서 다시 “내 살[肉] 같던”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너’와의 동일화를 뜻하는 이 표현은 ‘너’와의 분리가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이미 ‘나’인 ‘너’를 ‘나’로부터 완전히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그 살을 남김없이 떼어 쥐에게 던져주어도 끝끝내 남는 ‘나’는 어찌할 것인가.

 

나는 바이올렛보다 더 화려한 꽃을

먹어치운 적 있다

코앞에 수없이 피고 지는 꽃들을

눈도 꿈쩍 않고 다 먹었다

이제 나만 먹어치우면 된다

―「꽃밭에서」 부분

 

‘너’를 ‘나’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마지막 해결은 불가능의 원인인 ‘나’를 없애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해서 이 시의 화자는 “이제 나만 먹어치우면 된다”고 선언한다. 자기 소멸을 꿈꾸는 이 화자의 목소리는 잔인하고 비장하며 단호하다. 수없이 피고 지는 꽃들을 눈도 꿈쩍 않고 먹어치웠듯이 자신을 먹어치워야겠다는 선언은 자학적이다. 이 자학의 근원에는 애도작업에 실패한 자의 처참한 자기이해가 담겨있다. 다른 시 「사바아사나」의 “다시는 산 사람들 틈에 끼어들지 않아도 될 그날이 오늘이면 좋겠습니다.”와 같은 구절에서도 이러한 자기이해로부터 생성된 죽음 충동을 읽을 수 있다. 세월의 모든 슬픔을 끝끝내 지워낼 수 없는 오십 세의 여자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먹어치울까?

 

 

2. 우겨넣기와 잘라내기

 

시간의 무게만큼 쌓인 슬픔(기억)과의 결별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그 결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황희순은 슬픔과의 완전한 결별을 위해 자신의 해체가 불가피함을 깨닫는다. 여기서 그가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어떤 방식으로 지니고 있었나 상기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앞서 보았던 “슬픔만 파먹던, 죽을힘 다해 찾은 열쇠로 몸을 열었던, 활짝 연 몸 착착 접어 장롱에 감추던, 장롱에 들어서야 비로소 숨을 고르던 서른 살”(「갇힌 기억들」)이라는 구절을 다시 생각해보자. 이 구절을 보면 화자는 두 겹의 외피 속에 슬픔을 가둔다. 하나는 자신의 몸이며 다른 하나는 장롱이다. 다시 말해 몸의 일부가 된 슬픔을 장롱 속에 접어 넣는다. 슬픔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혹은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감춤으로써 그는 기억의 고통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소유한다. 슬픔을 남과 나누지 않는 이 소유의 욕망에는 역설적이게도 과거 슬픔에 대한 깊은 애착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가 애도작업에 실패하는 원인이 이러한 애착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해서 그는 오로지 ‘내 것’일 수밖에 없는 슬픔을 퍼먹으며 그것을 육화시킨다. 슬픔의 육화가 그것을 몸속에, 장롱 속에 감추는 행위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는 세상과의 절연을 함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들아, 어미의 실종을 말하지 마라

영원히 종적을 감추고 싶지만, 꼬리가 너무 길어

비어지려는 징그러운 이 긴 꼬리를

손에 둘둘 말아 쥐고, 잠시

칼날을 피해 숨어있을 뿐이니, 아들아

어미의 무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숨바꼭질」 부분

 

슬픔을 감춰두었던 ‘장롱’의 공간이 이 시에서는 ‘무덤’으로 변용된다. ‘무덤’이 ‘실종’된 자의 거처를 상징한다면 실종이 곧 죽음이라는 의미의 등식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세상으로부터 종적을 감추고 싶은 화자의 욕망은 철저히 자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칼날’로 상징되는 가학적 힘을 피해 숨어든 곳이 바로 ‘무덤’이기 때문이다. ‘무덤’은 그에게 마지막 피신처이면서 동시에 생명이 말소된 죽음의 공간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한다. 황희순의 화자는 외로운 무덤 속에 숨어 겨우 숨을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시인은 슬픔을 육화시킨 화자를 길고 거대한 파충류의 형상으로 그려낸다. 손에 둘둘 말아 쥐어야 할 만큼 긴 꼬리가 바로 육화된 슬픔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이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슬픔이 얼마나 ‘징그러운’ 것인가를 드러낸다. 무겁고 거추장스럽고 소름끼치는 화자의 초상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비애를 거대한 덩어리로 느끼게 한다. 그런데 징그러운 몸으로 육화된 슬픔은 자꾸 무덤 밖으로 비어지려 한다. 완벽하게 자기를 감추지 못하는 또 한 번의 비애가 여기에 겹쳐 있다. 황희순의 시쓰기는 바로 이와 같은 절연으로서의 소통이라는 역설적 의미를 갖는다. 그는 시 「고백하자면」에서 “바닥이 보일까봐 거울 안 본 지 오래, 어두운 쪽으로 목이 자꾸 길어졌다. 길어지는 목을 수시로 베어 詩 속에 욱여넣고 봉했다.”라고 쓰고 있다. 어둠의 목을 베어 시에 욱여넣는 행위, 그것은 슬픈 기억을 몸속에 우겨넣고 봉하는 행위와 등가적이다. 환언하면 그의 슬픔은 몸이며 그 몸의 언어가 시라 할 수 있다. 잠그고 감추고 욱여넣고 봉함으로써 비로소 태어난 역설의 언어가 그의 서른 살과 쉰 살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슬픔을 내면화하는 이 같은 방식의 삶에서 외부로 향한 모든 길은 차단된다.

 

막다른 골목에 서있던 그 봄, 발길 닿는 곳마다 경로이탈 경고음이 울렸다. 더 이상 디딜 곳 없어 발을 잘라 몸속 깊이 숨겼다. 발을 숨긴 몸에 여러 갈래 길이 생겼다. 길은 점점 자라 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위태로운 바람이 여름을 가을을 겨울을 아슬아슬 지나갔다. 달거리도 오락가락했다. 금간 틈새를 비집고 손 하나가 들어왔다. 그 손은 낯선 길로 나를 데려가 발이 되어주곤 했다. 길 끝을 틀어쥐고 있는 손에 길들여진 몸이 발 없이도 밖을 나다녔다. 발/길을 문득문득 잊었다. 느슨하거나 팽팽해진 길 위, 어릿광대가 되어갔다.

―「길의 배경」 전문

 

‘발’은 움직임을 낳는 상징적 기표이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지점에서 화자는 자신의 발을 잘라 몸속에 우겨넣는다. 그는 이제 외부로 향한 길을 다 거두어들임으로써 오로지 내부의 움직임만으로 자신의 생을 지탱하고자 한다. 그러나 움직임이란 근본적으로 외향성을 갖는 것이다. 감추고 우겨넣고 봉해도 움직임이 지속된다면 봉인은 뜯길 수밖에 없다. “길은 점점 자라 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라는 구절이 이를 말해준다. 완벽한 차단, 완벽한 숨김에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실패는 표면적으로는 숨김을 소망하는 자의 의지가 무산되었음을 뜻하지만 이면적으로는 황희순의 화자가 쉽게 자신의 생명성을 포기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몸의 생명성이 움직임과 더불어 지속되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 질긴 몸부림을 시인 스스로는 증오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황희순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기도 하다.

한편 봉인된 몸에 균열이 생겼을 때 몸속의 발은 세상의 길과 쉽게 조우하지 못한다. 시간은 ‘아슬아슬’하게 흘러가고 그 사이 화자는 늙어간다. 마음은 몸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몸은 마음과 달리 세상 밖을 향해 틈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이율배반적인 사태는 죽음 충동과 생명 충동 사이에서 벌어진다. 이때 누군가의 손이 화자를 이끈다. 이 시에 등장하는 타인의 ‘손’이 대변하는 그가 누구이든 그는 화자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려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화자를 깊이 사랑하는 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화자는 “어릿광대가 되어갔다.”라고 고백한다. 이는 자발성을 잃어버린 자신에 대한 진단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세상과의 적극적 화해를 거부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황희순의 화자가 드러내는 적극적 의지는 세상과의 화해가 아니다. “이제 나만 먹어치우면 된다”(「꽃밭에서」)는 선언에서 보았듯이 그는 자신을 해체해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나를 사가세요. 부위별로 팝니다. 흐벅지진 않지만 오십여 년 숙성된 살이 말랑말랑할 거예요. 세상을 휘젓고 다닌 팔과 다리는 좀 싸게 팔아요. 엉덩이에 난 바람구멍은 살짝 도려내고 드세요. 가슴에 영영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만들지도 몰라요. 젖가슴과 허벅지는 할인되지 않아요. 입술은 혀를 끼워 팝니다. 혀 없는 입술은 좀 싱거울 테니까요. 갈비뼈 사이엔 아팠던 흔적이 사리처럼 끼어있을 거예요. 약이라 생각하고 꼭꼭 씹어 드세요. 간장은 다 녹아 못쓰게 됐을 거예요. 진창도 풍덩풍덩 밟았던 발과 아무나 덥석덥석 잡았던 손이 문제군요. 아랫도리를 통째로 사가면 손은 덤으로 드릴게요. 잠 안 오는 밤 혹시 위안이 될지 모르니까요. 발은 팔지 않을래요. 갈 곳이 있거든요. 꼭 한번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껍질은 살살 벗기세요. 입맛에 맞게 회를 뜨든지 탄력이 없다 싶으면 소금구이해 드세요. 뼈는 잘 고아 조금씩 마셔요. 뼈에 사무쳤던 일 많아 독이 있을지 몰라요. 아, 당신이군요. 어떤 부위를 잘라드릴까요.

―「부위별로 팔아요」 전문

 

한 고객이 문자메시지로 가장 자신 있는 부위 팔라 했다. 또 한 고객이 전화로 손을 끼워 파는 부위 살 테니 얼마면 되느냐 물었다. 또 한 고객이 이메일로 맛보고 사도 되느냐 물었다. 한 고객을 또 만났다. 그는 카드로 결재하자, 당신은 내 거니까 이제 나만을 위해 웃어라 했다. 한 고객에게는 누가 몽땅 사갔다 했더니 쯧쯧, 뭐에다 써먹으려구… 했다. 써먹든 말든 이쯤에서 세일광고를 접는다. 좌판에 찢어발겨 놓은 나를 거둬들인다. 남은 부속품은 폐기처분하기로 한다. 나는 이제 품절이다.

―「나는 이제 품절이다 ―「부위별로 팔아요」 후렴」 전문

 

신체 훼손, 혹은 절단, 절개의 이미지는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한국 여성시의 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일군의 여성시에서 여성성의 수난과 소외를 피 흘리는 몸, 찢긴 자궁, 분할된 신체, 강간과 사산 등의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최승자를 비롯한 몇몇 선취적 노력을 제외하면 이제 이러한 반복이 진부함을 낳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신체 훼손의 이미지가 진정성을 담보하지 못한 채 과도하게 구현되거나 거칠기만 한 시의 문법을 양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희순의 시에서 종종 발견되는 신체 절단의 이미지는 일종의 ‘유행’과는 질적 차이를 갖는다. 그의 시에 보이는 신체 훼손이 잔인한 이미지 이상의 절박성을 지닌 존재론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황희순은 ‘우겨넣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자신을 해체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인용한 두 편의 시는 ‘우겨넣기’를 ‘절단하기’로 바꾸는 결단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부위별로 팔아요」에 등장하는 화자는 자신의 신체를 낱낱이 해체한다. 그 과정에서 각각의 신체 부위가 그 동안 담당해왔던 역할을 함께 나열한다. 세상을 휘젓고 다닌 팔과 다리, 엉덩이에 든 바람구멍, 가슴에 맺힌 구멍, 갈비뼈 사이에 낀 통증, 다 녹아버린 간장, 뼈에 사무친 독 등이 그것이다. 이는 오십 세를 살아낸 한 여자의 해부도라 할 수 있다. 황희순은 병든 몸의 해부도를 통해 자신의 누적된 세월의 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된 몸은 세월의 전시이며 상처의 전시라 할 수 있다. 황희순은 절단된 신체를 전시함으로써 오십 세의 시간의 무게를 단번에 해체시키고자 한다. ‘우겨넣기’의 반복을 한꺼번에 ‘쏟아내기’ 혹은 ‘잘라내기’로 바꾸고자 하는 이 분출의 욕망을 통해서 우리는 슬픔의 극한에 닿게 된다.

이때 화자는 절단된 자신의 몸을 자신이 소유하고자 하지 않는다. ‘팔다’라는 행위가 이를 말해준다. 신체의 조각들을 타인에게 양도함으로써 완벽하게 내 것이 아닌 ‘나’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존재의 사물화와 마주치게 된다. 물건을 내다 팔듯 “좌판에 찢어발겨 놓은” 화자의 몸은 더 이상 존재라 할 수 없다. 자신을 비존재의 사물성으로 전환시키는 이 같은 자학의 심연에는 자신을 폐기처분해야만 하는 존재의 ‘끝’이 내포되어 있다. 자기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환상을 황희순은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우겨넣었던 모든 슬픔을 제거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자신의 존재성을 이렇게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3. 상실의 구멍 속으로 흘러드는 몽유의 세계

 

세상과의 모든 유대를 차단한 채 징그러운 슬픔과 상처를 온몸에 둘둘 말고 장롱 속으로, 무덤 속으로 유랑해 온 오십 세의 여자. 그 세월의 무게에 스스로 질려 자신의 몸을 낱낱이 찢어발겨 놓고 팔아치운 여자. 품절된 여자. 완벽하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꿈꾸었던 여자. 황희순이 그려낸 오십 세의 여자는 이 같은 타나토스적 상상의 세계를 건너며 과연 진정으로 가벼워진 것일까? 시인은 “혓바늘을 족집게로 쏙 뽑아낸 후 퓨즈 나간 전등처럼 내 몸이 꺼졌다.”(「통점」)라고 쓰고 있다. 아픈 것을 뽑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암전된다. 무통증의 상태에서 그는 “나는 죽었나 살았나. 왜 아프지 않은가.”(「통점」)라고 되묻는다. 사라진 통증이 존재감의 상실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슬픔을 얼마나 철저하게 육화시켜 왔는가를 반증한다. 슬픔의 해체가 곧 존재의 해체라는 사실을 통해 그는 과거 기억과 슬픔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준다. 모든 슬픔을 잘라낸 후 ‘나’는 텅텅 빈 ‘無’로 환원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황희순 시의 맥락은 여기서 종결되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시 「길의 배경」에서 발견되는 “발을 숨긴 몸에 여러 갈래 길이 생겼다.”라는 구절이나 「부위별로 팔아요」에서 보이는 “발은 팔지 않을래요. 갈 곳이 있거든요. 꼭 한번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라고 한 부분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황희순 시에서 반복되는 죽음 충동과 외부로 향한 이 같은 조짐은 대단히 모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죽음 충동 이면에 그보다 더 강한 생명 충동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 생명 충동이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를 더 괴롭혔던 것이 아닐까? 죽어버리고 싶은데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자꾸 되살아날 때 삶은 더 힘겨워질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에 있다. 황희순 시의 매력과 긴장감은 평범한 오십 세의 여자에게서 좀처럼 찾기 어려운 내적 에너지를 드러낸다는 점에 있다. 상처와 고통에 함몰될 수 없는 한 존재의 생명감을 그는 끝내 놓지 않는다. 그의 시에서 이는 ‘몽유’ 혹은 ‘피안’의 형태로 형상화되곤 한다.

 

소피보러 고추밭 고랑 깊숙이 숨어들어 갔어요. 워낙 급한 터라 염치불구 볼일을 보고 옷 추스르는데 어머, 마른 고춧대가 옆구리를 슬쩍 찌르는 겁니다. 돌아보니 탄저병 걸린 고추가 여기저기 애면글면 몸을 세우고 있었어요. 지그시 눌려있던 야성이 근질거리지 뭐예요. 아랫배에 고였던 피가 하르르 도는 찰나 고추밭 끄트머리 반백의 그가 한눈파는 나를 불렀어요. 고춧대를 분지르며 발길 돌리는데 비릿한 봄바람이 등을 툭 치며 다가오데요. 화악, 달떴지요 뭐.

―「몽유」 전문

 

한 성직자가 2012년 대혼란이 올 거라며 높고 깊은 산골짝에 별장을 짓는다고 했다. 금성보다 큰 혜성이 다가와 지축을 돌려놓고 어마어마한 쓰나미가 지구의 반은 쓸어갈 거라 했다. 종말이 온다 해도 우주를 말하자면 인간은 티끌만도 못할 터. 하지만 애인아, 우리 튀자. 46억 년 묵은 지구는 너무 지겹지 않은가. 종말이 오기 전에 푸른빛이 도는 젊은 별을 찾아 줄행랑치자. 40억 년 전 이미 우리 사랑은 삼엽충 DNA 속에 숨어 있었던 것. 그러니 애인아, 그 별에서 하루를 백년처럼 야금야금 파먹으며 한 만년 살자.

―「到彼岸」 전문

 

시 「몽유」에 보이는 밭과 배설의 합치는 생산력과 직결되는 원형적 상상력을 함축한다. ‘탄저병 걸린 고추’에 암시되어 있듯이 이 시의 배경이 된 고추밭은 부실한 생명 토대를 나타낸다. 그럼에도 화자는 하복부에 고여 있던 것을 이 밭에 쏟아낸다. 그 순간 “아랫배에 고였던 피”가 순환하기 시작한다. 피의 순환은 에너지의 가동을 뜻한다. 비로소 몸은 따뜻해지고 비릿해진다. 이때 존재 내부에 생성된 열은 밖으로 뿜어진다. “화악, 달떴지요 뭐.”라는 발언이 이를 말해준다. 이 같은 리비도의 충동은 앞서 살폈던 황희순의 작품과 전혀 다른 느낌을 드러낸다. 한편 시 「到彼岸」의 화자는 지구 종말의 예언 앞에서 “하지만 애인아, 우리 튀자.”라고 경쾌하게 말한다. 황희순의 상상력에 ‘젊은 별’이 살아있다는 사실은 기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장롱과 무덤 속에 숨어 있던 슬픔의 덩어리가 ‘밭’과 ‘젊은 별’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목할 것은 탄저병 걸린 고추밭과 46억 년 묵은 지구를 단번에 쇄신하려는 에너지의 충동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 에너지의 충동은 마른 고춧대로 쏟아지는 물(소피)의 이미지와 묵은 별을 뛰어넘는 ‘튀자’라는 시어가 내포한 개방성을 통해 전달된다. 아울러 “40억 년 전 이미 우리 사랑은 삼엽충 DNA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라는 구절에서도 시간의 개방성을 읽을 수 있다. 오십 년 동안 누적되었던 고통의 시간을 40억 년 전의 과거 시간에 풀어놓음으로써 그는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먼지에 불과한 것으로 무화(無化)시키고자 한다. 몸을 열고 공간을 열고 시간을 열어 피를 돌게 함으로써 우겨넣었던 모든 길의 사지를 펴놓고 있는 것이다. 시 「고백하자면」에서 시인은 “길어지는 목을 수시로 베어 詩 속에 욱여넣고 봉했다. 하여 사십 줄을 머리 없이 살았다. 다시 피돌기 시작한 이 머리는 새로 돋은 거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몽유」와 「到彼岸」 두 편의 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생명 충동은 몽유와 피안의 세계에서 일어난다. 현존의 시간에 잇대어 놓기에는 아직 먼 꿈의 세계가 아련한 저편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사지를 몽땅 다 절단한 달걀귀신 같은 한 여자의 텅 빈 내면으로 흘러드는 저 아름다운 몽유의 세계는 얼마나 처연한가. 황희순 시가 울려주는 지극한 슬픔은 여기에 있다. 상실과 상처를 넘어 몽유하는 자의 애잔함 속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과 몽유 사이에서 숨을 몰아쉬는 오십 세 여자의 슬픈 심장에 손을 밀어 넣게 하기 때문이다. 거기 여전히 물컹 만져지는 것이 있다.

 

술만 마시면 무엇이든 가방에 집어넣는 버릇 있다 조약돌이나 씨앗이나 먹다 남긴 소주나 땅콩이나 맘에 드는 사람이나

하여 내 가방은 사시사철 부엉이집이다 어지러운 가방 정리하다 보면 물컹 썩어있는 건 언제나 사람

사람은 본체만체해야지 후회하면서 그 버릇 놓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가방에서 슬슬 냄새 풍기는 사람 있으니

―「손버릇」 전문

 

우리를 지극히 기쁘게 하는 것들 그리고 우리를 지극히 슬프게 하는 것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기쁨과 고통을 만들어내는 관계의 끈이 없다면 시간의 주름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 가방’ 안에 “물컹 썩어있는 건 언제나 사람”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리고 “지금도 가방에서 슬슬 냄새 풍기는 사람”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살아 있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방 속에, 장롱 속에, 무덤 속에 다 우겨넣을 수 없는 무수한 관계의 끈들을 징그러운 긴 꼬리처럼 둘둘 말아 쥐고 시간을 건널 수밖에 없는 일이다.

황희순의 시는 우아함의 반대편에 놓인 한 존재의 형상에 주목한다. 그 존재는 정확히 오십 세의 여자이다. 오십에 이른 한 여자의 내면에는 그 세월의 무게만큼 무거운 기억의 퇴적층이 쌓여있다. 거기, 망각되지 않는 상실의 심연이 놓여있다. 상실의 우울을 거듭 우겨넣고 잘라내면서 그의 상상력은 때로 사납고 잔인하게, 때로 자학적으로 시의 언어를 휘몰아간다. 그러나 시의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시에서 자주 발견되는 ‘피’의 냄새가 서서히 깊은 슬픔으로 잦아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역겨움과 혐오감을 의도화했던 저간의 잔혹시와는 다른 생의 서사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가 근본적으로 의도했던 것은 공포나 잔혹의 묘사가 아니다. 그는 상실의 고통을 겪었던 오십 세 여자의 내면 풍경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 이 삶 속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기나 한 것인가, 내면의 슬픔과 기억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묻는다. 그 물음은 뜨겁고 절박하다. 온몸을 다해 자신의 존재성을 묻는 오십 세 여자! 그는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버린 채 불행한 존재의 진실에 닿고자 한다. 수많은 슬픔을 퍼 먹은 시간의 얼굴, 오십 세 여자의 텅 빈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