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詩 비평

시 <나를 견인 중이다>/호병탁(문학평론가)

섬지기__황희순 2015. 9. 8. 22:05

 

  나를 견인 중이다

   황희순


   물리치료사가 가슴을 염하듯 묶어 침대에 고정시킨다. 엉덩이 묶은 줄을 기계가 잡아당긴다. 우지직 허리가 늘어난다. 윗몸과 아랫몸이 따로 논다. 그의 사랑 생각하는 가슴과 그의 몸 생각하는 아랫도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못을 박는 듯한 허리 통증이 잠시도 멈추질 않는다. 침대가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한다. 당겨진 아랫도리가 몸에서 쑥 뽑혀 병실을 걸어 나간다. 꽁꽁 묶인 겨드랑이께가 근질근질하다. 반 토막 난 몸, 이젠 정말 가볍게 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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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시에는 가슴, 엉덩이, 허리, 아랫도리, 겨드랑이 등 생리학적인 '몸'의 여러 부분들이 나열된다. 이러한 구체적인 육체의 수용 과정에서 세계는 새로운 의미와 구체적인 현실성 및 물질성을 획득하게 된다. 세계는 이제까지의 의식적 인간과는 전혀 다른 물질적 인간과 접촉하게 되고, 이제 인간의 육체는 세계의 비중과 그것이 개인에게 지니는 가치를 측정하는 구체적 척도가 되는 것이다.

  이 육체의 각 부분들은 서술되는 동사에 의해 '고정되어'지고, '잡아당겨'지고, '늘려'지고, '박혀'지고, '뽑혀'진다. '근질근질'해지기도 한다. 이런 묘사는 익살스럽고 어느 정도 환상적으로도 느껴진다. 그러나 아래에서 보겠지만 육체가 피동적으로 다루어지는 동작의 설명들은 냉정하리만큼 정확하고 치밀하다.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들 정도다.

  화자는 허리가 아파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시술자는 화자의 '가슴'을 "염하듯 묶어" 고정시킨다. '염하듯'이라는 수식어는 화자의 몸이 시체처럼 다루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 "엉덩이 묶은 줄을 기계가 잡아"당기자 허리가 "우지직" 소리를 내며 늘어난다. 그러나 "윗몸과 아랫몸이 따로" 놀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묶은 줄'과 '당기는 기계'는 당연히 물질적이다. 이에 따라 허리가 늘어나 위아래가 따로 노는 인간의 몸도 철저한 '물질적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아니 몸은 물질적인 것들 중에서도 일정한 부피와 질량을 가진 '물체'에 불과하다. '의식'에서 독립해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가 '물질'이다. 물질과 의식은 세계의 근본을 이루는 가장 큰 개념이다. 인간은 사고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분류하고 또 분류하여 물질과 의식이라는 가장 큰 개념에 도달했다. 세계에 물질과 의식 이외의 것에 속하는 것은 없다. 종교는 신을 정신적 존재로 간주한다. 실제로 믿음이 강한 자만 신을 느낀다. 그렇다면 정신이나 믿음은 의식적인 것이고 따라서 신도 의식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카니발은 바로 물질적인 것에 경도되고 특히 그 중 '인간의 육체'는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런데 '육체'와 '성'은 언제나 지근거리에서 연계되며 교차하기 마련이다. 시에서 열거되고 있는 육체의 각 부위와 '당기고' '박히고' '뽑히고'와 같은 동사들을 결합하면 우리는 쉽게 가슴 뛰는 '성'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시에서 화자는 "그의 사랑 생각하는 가슴과 그의 몸 생각하는 아랫도리"라는 결정적인 발화를 통해서 육체의 성적 기능에 대한 정확한 진술을 하고 있다. 윗몸에 해당하는 '가슴'은 사랑이란 정신적 정서와 감정이 깃든 곳이다. 그러나 허리 아래 부분인 '아랫도리'는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생식기관이 있는 곳이다. 그것들이 이제 통제불능이 되고 있다. 즉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결국 "당겨진 아랫도리가 몸에서 쑥 뽑혀 병실을 걸어 나간다." 이 문장은 그로테스크한 느낌과 함께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유발한다. 카니발적 세계관은 성(聖)과 속(俗), 높음과 낮음, 위대화 열등, 현명과 우매 등을 친숙케 하고 결합시킨다. 특히 비속화는 중요하다. 영혼이 담긴 성스러운 몸은 '쑥 뽑히는 것'으로 모독되고 있는 것이다.

  그로테스크한 느낌과 함께 유발되는 '웃음'은 매우 상호모순적이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화자는 "꽁꽁 묶인" 윗몸의 "겨드랑이께가 근질근질하다"고 말한다. 허리 아래가 뽑혀 "반 토막 난 몸"이 되었기 때문에 "이젠 정말 가볍게 날 수" 있을 것이라고 조롱하는 듯 한술 더 뜨며 역시 모순적인 웃음을 유발시킨다. 발생학적으로 이런 웃음은 원시적 제의형태와 관련이 있다. 예로 사람들은 태양-지고하고 성스러운 신, 혹은 최고의 권력자와 등가를 가지는-을 소생기키기 위해 오히려 그것을 모독했다. 하지와 동지를 통해 태양의 생명이 급변하는 것에 대한 반응을 조롱의 웃음으로 대신했다. 성스러운 것과 최고 권력을 지향한 이 제의적 웃음은 엄숙함이 허용하지 않는 것을 허용하는 '웃음의 특권'을 만들어내게 된다. 여기에서 거리낌 없는 자유로운 몸짓과 솔직한 언어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런 웃음은 죽음과 소생, 생식력과 그 행위의 상징과 연관된다. 아랫도리가 뽑혀버렸다는 것은 생식력은 물론 그 행위와의 영원한 결별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죽음이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땅에서 썩어야 새싹을 틔운다. 이제 가벼워진 몸은 겨드랑이가 근질근질하더니 마침내 하늘로 비상하게 된다. 교체와 변화, 죽음과 갱생의 파토스는 카니발 세계관의 핵이다.

  이 결미 부분은 이상의 <날개> 마지막 대목을 패러디한 것으로 보인다. 패러디는 이런 세계관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은 수많은 풍자극으로 패러디되며 골계화되었다. 시인들은 새로운 이미지로 다각적으로 서로를 패러디한다. 이는 대관(戴冠)-박탈과 같이 교체와 재싱의 필연성과 동시에 그런 행위의 창조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체제와 질서, 권력과 위계의 유쾌한 전복을 통해 '거꾸로 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패러디는 언제나 상호모순적인 이중성을 띤다. 황희순은 상(像)을 여러 방향과 각도로, 길게 혹은 짧게 비추는 울퉁불퉁한 멋진 거울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허리 통증을 치료하는 병실의 정황을 이처럼 놀랍게 비취 보여주는 것만 봐도 그러하다.

 


_____ 2015. 대전작가시선 제11집 <내가 시인인 이유>,

병탁 해설 <빛나는 검림(劒林) 숲에서 만끽한 행복>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