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황희순 시집 『미끼』
우주를 향한 몸의 환유
나호열(시인)
황희순의 네 번째 시집 『미끼』는 몸속에 유령처럼 떠도는 마음에 관한 기록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몸과 마음은 서로를 견주면서 동시에 서로를 견딘다. 이 오래된 불편에 대해 인간은 투덜대거나 아예 그 불편함을 잊어버리려고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해 왔지만 몸과 마음은 여전히 에로스Eros의 양극단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우리에게 있어서 몸에 대한 담론은 금기禁忌의 영역으로 추방되거나, 남/여의 단선적이고 이분법적 권력으로부터 마음의 해방을 부르짖는 에로티시즘으로 개방되어 왔지만 여전히 몸은 은밀해야 하고 신비로 남겨두어야 할 소도蘇塗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그런 까닭에 몸을 주제로 삼든, 소재로 삼든 이를 다루는 시인들은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불온한 시선을 던지는 세상과의 일전一戰을 각오해야 한다. 이런 꺼림칙한 시선은 시집 『미끼』를 둘러싼 시인 황희순과 자연인 황희순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면서 또 다른 오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즉, ‘화자話者 = 창작자 = 자연인인 시인’ 의 등식이 시집에 등장하는 수다한 ‘여자’들의 행적으로 말미암아 오해의 정당화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다 버리고, 부처나 끌어안고 배알 꼴리는 대로 신나게 한판 놀아봐야지. 그러다 덜컥 피가 돌아 팔을 쭉 뻗기라도 하면 어쩐다지?
—「Exit」 마지막 부분
종말이 오기 전에 푸른빛이 도는 젊은 별을 찾아 줄행랑치자. 40억 년 전 이미 우리 사랑은 삼엽충 DNA 속에 숨어 있었던 것. 그러니 애인아, 그 별에서 하루를 백년처럼 야금야금 파먹으며 한 만년 살자.
—「到彼岸」 마지막 부분
그러나 거침없이 펼쳐내는 위와 같은 토로가 단순한 치정癡情의 발로가 아닌, 치열하게 삶을 사유하고 투쟁한 끝에 시인이 거두어들인 무애無碍의 노래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시집 『미끼』는 시인이 겪었던 기억과의 싸움, 그 싸움 끝에 얻어낸 상처의 기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사람이 새끼손가락을 떼어갔다 다음 사람이 귀를 떼어갔다 다음은 입을 떼어갔다 눈을 떼어갔다 코를 떼어갔다 다음은 팔을 다리를 떼어갔다 잔머리 굴린다며 머리를 떼어갔다 그 다음 사람이 달걀귀신처럼 둥그러진 여자를 버렸다 버려진 여자는 아무데나 굴러다니며 한자리에 머물지 못했다 굴러다니다 만난 또 한 사람이 아직도 몸이 따뜻하다며 가슴을 열고 심장을 떼어갔다 어디에 부려놓아도 깨질 일 없는 여자는 이제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시 「미끼」 전문
시집의 표제 시이기도 한 「미끼」의 피학자는 둥그러진 여자, 버려진 여자, 어디에 부려놓아도 깨질 일 없는 여자이다. 「미끼」와 동일 계열의 시들인 「부위별로 팔아요」, 「나는 이제 품절이다」를 살펴보아도 「미끼」의 정황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단언컨대, 시집 『미끼』를 추동하는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협소한 의미의 여자가 아니라 ‘저항할 힘이 없는, 체념한, 소수의, 상품화, 부속품……’ 등등의 존재의 정당성을 상실한 ‘그 모든 것’이다. 마음(정신)이 몸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없듯이, 그렇다고 몸이 마음을 방목할 수 없듯이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세상(타자, 사회)과의 관계를 단절할 수 없다. 또 한 개인 속에 자리 잡은 수많은 타자는 몸과 마음의 관계에서 보이듯 신기루처럼, 유령처럼 욕망으로 자리 잡은 또 다른 ‘나’이다. 잡풀로 자라는 그 욕망은 저절로 우거지고 그 욕망을 죽이기 위해서는 제초제가 필요하며 그 제초제는 욕망을 인지하는 저주받은 자아마저 죽여 버린다. 그러나 제초제 없이도 살 수 있는, 종달새 한 마리 깃들여 사는 자아를 다음과 같은 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친구가 제초제를 마시고 죽었다. 농사꾼인 그의 몸에 제초제로 다스려야 할 잡풀 자라고 있었던 거다. 식구들 모르게 우거졌던 거다.
내 안에도 잡풀 자라고 있다. 우거진 수풀 속에 착한 종달새 한 마리 깃들여 산다. 종달새 깃든 그곳에 제초제 없이도 환한 길 하나 생겼다. 나 그 길로 세상을 들락거린다.
—「몸속 풀씨는 누가 뿌리나」 전문
이렇게 잡초만이 무성한 격절되어 있는 세상을 들락거릴 수 있는 것은, “써먹든 말든 이쯤에서 세일광고를 접는다. 좌판에 찢어발겨 놓은 나를 거둬들인다. 남은 부속품은 폐기처분하기로 한다. 나는 이제 품절이다.”(「나는 이제 품절이다」 마지막 부분)와 같이 자아를 거둬들이고, 폐기처분하며 자신을 품절하는 가혹한 시련의 결과이다. 시인(시적 화자)이 겪은 시련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화자를 배제하고 시인 자신(황희순)을 시의 전면에 내세운 회고는 다음과 같이 상상력을 배제한 체험의 진정성으로 다가온다.
서른 살 황희순이 20년을 한달음에 건너와 어깨를 툭 친다. 쉰 살의 적막을 흔들흔들 오가는 황희순이 비밀번호도 없이 열린다. 머리꼭지까지 고인 엄동의 바람이 피식 빠져나간다. 쭉정이 늙은 봄이 곧 또 올 것이다.
—「갇힌 기억들」 부분
한달음에 건너 왔다고는 하지만 청춘에서 중년을 훌쩍 넘긴 20년은 그 누군가가 몸을 강제로 떼어가고(「미끼」), “막다른 골목에 서있던 그 봄……(중략) 더 이상 디딜 곳 없어 발을 잘라 몸속 깊이 숨”겨야 했으며(「길의 배경」) 급기야 어릿광대가 되어야만 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릿광대로 위치하면서도 자신이 어릿광대임을 자각하는 대자적 존재인 나에게로 다가오는 소멸이나 죽음에의 유혹은 강력하지 않다. 총체적인 ‘나’가 아닌 부분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부위별로 나를 파는 마조히즘—이때의 가학적 상태는 몸을 대상으로 하는 성적 의미와는 구분되어야 한다—의 저항으로 나아간다. 부위별로 판다는 것은 전체로서의 ‘나’를 잊지 않고, 잃지 않으려는 탁월한 선택이었던 까닭에 이 저항은 제초제를 뿌리지 않아도 종달새가 깃드는 평온의 장면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집을 해설한 엄경희는 너무도 명확하게 『미끼』의 요의를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그가 근본적으로 의도했던 것은 공포나 잔혹의 묘사가 아니다. 그는 상실의 고통을 겪었던 오십 세 여자의 내면 풍경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 이 삶 속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기나 한 것인가, 내면의 슬픔과 기억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묻는다.
분명 ‘나’를 괴롭히고 사물화시키면서 ‘나’를 떼어가고, 팔고 사는 물건으로 전락시킨 것은 사람이다. 이 진저리쳐지는 타자라고 불리는 존재는 복수의 대상이거나 아예 망각해버려야 할 존재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 존재로 인하여 더욱 강력하게 사람에 대한 희망과 그리움을 버리지 못하게 한다. 앞서 언급한 시 「Exit」나 「到彼岸」은 이런 맥락에서 치정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다.
술만 마시면 무엇이든 가방에 집어넣는 버릇 있다 조약돌이나 씨앗이나 먹다 남긴 소주나 땅콩이나 맘에 드는 사람이나
하여 내 가방은 사시사철 부엉이집이다 어지러운 가방 정리하다 보면 물컹 썩어있는 건 언제나 사람
사람은 본체만체해야지 후회하면서 그 버릇 놓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가방에서 슬슬 냄새 풍기는 사람 있으니
—「손버릇」 전문
그렇다! 시집 『미끼』는 정신의 절망과 몸의 폐허에 발을 숨겨놓음으로서 끝내 종달새가 우짖고 세상과 들락거릴 수 있는(희망) 길을 일러준다. 가학과 피학을 오가는 내 안에 출몰하는, ‘나’라고 인정할 수 없는 ‘수많은 나’와의 조우,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타자와의 관계가 이어지는 길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그 길은 이 험하고 실타래처럼 꼬인 속세의 길이 아니다. 그 길은 광활한 우주로 향하는 하찮은 호모 사피엔스의 눈빛이며 절규이다. 시 「아무것도 아닌」은 시집의 첫 장에 읽어야 할 시가 아니라 시집을 덮으며 눈 감고 읽어야 할 시인 황희순의 따뜻한 전언이 집약된 시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 도가道家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시인의 언명(“태초 우린 모두 한 점에서 시작한 생물이니 뭐라 부른들 어떤가”)은 책으로 익힌 깨달음이 아니라 몸으로 깨친 우주와의 합일은 아닐까?
청개구리 날개는 언제 사라졌을까
사람의 꼬리는, 너를 그리워하던 마음은
언제 슬며시 사라진 걸까
쥐똥나무 울타리에서 청개구리가 운다
저거 무슨 새 소리야?
지나가는 아이가 제 어미에게 묻는다
글쎄, 무슨 새지?
저렇게 우는 새가 있었나 생각하다 나도 그만
새소리로 듣는다
손톱만한 초록색 등에 노란 날개를 그려 넣는다
그러니 얘야, 새로 알고 자라도 괜찮단다
태초 우린 모두 한 점에서 시작한 생물이니
뭐라 부른들 어떤가
서로서로 이름 없는 아무것도 아니어서
마주본 적조차 없으므로
사라진 것도 사라지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날개를 꼬리를 마음을 몸속에 사려두고
억겁을 피고 또 지면서
제 목소리로 출렁이고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아닌」 전문
「한국시 왜 감동이 없는가」 —우리시의 현황과 감동의 문제— (≪리토피아≫, 2005. 겨울)에서 김윤정은 “시는 첫째, 현실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해야 하고 둘째, 시는 언어미학적 예술성을 추구해야” 하고, 셋째, “시는 인간의 존재론적 지대에 대해 탐구해야”만 보편적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좋은 시의 요건이란 이 세 가지 요소가 함축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013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때, 수많은 시집 중에서 황희순의 시집 『미끼』를 읽으며 우리가 기억하는 좋은 시의 감동을 느낄 수 있음은 작고도 울림이 큰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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