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읽기·책읽기

검은 TV와 신문의 날들/조동범

섬지기__황희순 2012. 1. 30. 10:41

 

검은 TV와 신문의 날들

조동범


사무실을 나서는 남자의 어깨 위로
늙은 개와 썩은 생선 통조림으로 가득한 죽은 나무의 거리가 피어오른다.
남자는 가방을 든 채,
하수구를 향해 맹렬히 쏟아지는 썩은 생선을 바라보고 있다.
뻥 뚫린 생선의 주둥이는 죽은 나무의 가지에 걸려 몸속의 내장을 게워내고 있다
남자의 신발 속으로 생선의 내장이 비릿하게 들어선다.
남자의 가방은 썩은 생선의 대가리로 가득 찬다.
말라 죽은 나무와 썩은 생선의 거리를 지나 남자는
검은 버스를 타고 검은 구두의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남자를 바라보며 늙은 개는 더러운 밤을 뒤적인다.
남자는 검은 전등을 켜고 검은 샤워를 하고 어둡고 오래된 냉장고의 식욕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남자의 식사가 검은 전등불 아래에서 검게 빛난다.
남자는 검은 커튼을 치고 검은 TV를 켠 채 오래되고 익숙한 검은 날의 밤을 맞이한다.
남자의 검은 밤이 무수히 지나간다.
남자는 여전히 늙은개와 썩은 생선 통조림으로 가득한 거리를 지나
검은 구두의 집으로 돌아간다.
남자의 식탁은 어둡고 오래된 냉장고의 식욕으로 빛났지만 누구도 검은 전등불 아래에서의 식사를 본 사람은 없었다.
남자의 검은 밤과 검은 낮이, 무수히 지나간다.
남자의 검은 TV는 언제나 켜 있고
검은 구두의 현관 앞은 검은 신문으로 넘쳐 흐른다.
검은 신문에서 검은 활자가 쏟아졌지만 아무도 그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검은 현관이 열리는 것을 본 사람도 없었다 썩은 생선이 담긴
남자의 가방이 검은 구두의 현관으로 들어서는 듯도 했지만 그것의 냄새를 맡은 사람 역시 없었다.
검은 구두의 현관 너머에선 언제나
검은 TV의
검은 노래와
검은 코미디와
검은 쇼가
쉬지 않고 새어나왔다.
검은 TV와 신문이 도래한 날들이 시작되었다.

———
**조동범 / 1970년 경기도 안양 출생. 2002년 《문학동네》 등단.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산문집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문학평론집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등.

'詩읽기·책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정의 장소/장이지  (0) 2012.02.13
[스크랩] 노력을 소비할 것/정숙자  (0) 2012.02.08
나의 천축국/서안나  (0) 2012.01.07
겨울숲을 바라보며/오규원  (0) 2012.01.02
장미의 내부/최금진  (0) 2011.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