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수
비문증 외 1편
눈앞에 아른거리는 저 꽃
손을 휘저어도 잡히지 않는다
안경 너머 희미한 봄
오지도 않고 간다
있었던 것 없어지고
없었던 것 생겨나는 천지조화를
어찌 알랴마는
마음도 유리창처럼 뿌예지는
이 봄날
잡으려면 사라지는 것이
欲界 色界의 허깨비인 것을
이제 알겠다
내가 써온 시도
있는 것 감추고
없는 것 보여주며
사람 홀리는
허공의 꽃인 걸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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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168번지
떠돌이 셋방살이 등짐 풀어놓고
서울 하늘 아해 문패를 내걸었지
두 아이의 아비가 되고, 시인이 되고
그렇게 20년 머물러 또 무엇이 되고 싶었던 곳
성북동 168번지
서둘러 떠난 지 15년 만에
성북동 언덕길을 다시 오른다
길은 낯익고 집들은 낯설다
잘 있었느나, 오래된 가로등아, 녹슨 우편함아,
내게 배달되지 못한 편지들아, 반송된 옛사랑아,
오늘은 산번지가 시작되는 언덕에 앉아
옛집 마당을 내려다본다
내가 외면하고 살아온 젊은 날의 균열이여,
갈라진 축대 틈 사이로 언뜻언뜻 어리는
삼사집 대 허망의 그늘이여
미안하다,
시간은 나를 휩쓸고 간 강물이지만
나 또한 강물 따라 흐르는 저녁 바람이었구나
그렇지 않다, 그렇다*
하늘 아래 내 것이라 잡아둘 집이 없다
머지않아 땅을 뒤엎는 광풍이 몰아치면
성북동 168, 지번도 지워지리라
나 또한 어느 집 불이었다가
캄캄한 어둠 되어 지워지리라
미안하다,
도둑고양이야, 땅강아지야 쇠똥구리야, 애기똥풀아,
어디에도 나라고 할 만한 것 또한 없지 않느나
그렇다, 그렇지 않다
*불연기연不然基然 : 최수운의 <동경대전>, 然은 '그렇다'는 긍정적 의미
___이명수 시집 <風馬 룽다>(책만드는집, 2011)에서
***이명수 시인 : 1945년 경기 고양에서 출생/1975 <심상> 등단/ 시집 <왕촌일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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