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읽기·책읽기

비문증/이명수

섬지기__황희순 2011. 10. 26. 09:32

이명수

 

비문증 외 1편

 

 

 

 

눈앞에 아른거리는 저 꽃

손을 휘저어도 잡히지 않는다

안경 너머 희미한 봄

오지도 않고 간다

 

있었던 것 없어지고

없었던 것 생겨나는 천지조화를

어찌 알랴마는

마음도 유리창처럼 뿌예지는

이 봄날

잡으려면 사라지는 것이

欲界 色界의 허깨비인 것을

이제 알겠다

 

내가 써온 시도

있는 것 감추고

없는 것 보여주며

사람 홀리는

허공의 꽃인 걸 알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북동 168번지

 

 

떠돌이 셋방살이 등짐 풀어놓고

서울 하늘 아해 문패를 내걸었지

두 아이의 아비가 되고, 시인이 되고

그렇게 20년 머물러 또 무엇이 되고 싶었던 곳

성북동 168번지

 

서둘러 떠난 지 15년 만에

성북동 언덕길을 다시 오른다

길은 낯익고 집들은 낯설다

잘 있었느나, 오래된 가로등아, 녹슨 우편함아,

내게 배달되지 못한 편지들아, 반송된 옛사랑아,

오늘은 산번지가 시작되는 언덕에 앉아

옛집 마당을 내려다본다

내가 외면하고 살아온 젊은 날의 균열이여,

갈라진 축대 틈 사이로 언뜻언뜻 어리는

삼사집 대 허망의 그늘이여

 

미안하다,

시간은 나를 휩쓸고 간 강물이지만

나 또한 강물 따라 흐르는 저녁 바람이었구나

그렇지 않다, 그렇다*

하늘 아래 내 것이라 잡아둘 집이 없다

머지않아 땅을 뒤엎는 광풍이 몰아치면

성북동 168, 지번도 지워지리라

 

나 또한 어느 집 불이었다가

캄캄한 어둠 되어 지워지리라

미안하다,

도둑고양이야, 땅강아지야 쇠똥구리야, 애기똥풀아,

어디에도 나라고 할 만한 것 또한 없지 않느나

 

그렇다, 그렇지 않다

 

*불연기연不然基然 : 최수운의 <동경대전>, 然은 '그렇다'는 긍정적 의미

 

 

___이명수 시집 <風馬 룽다>(책만드는집, 2011)에서

 

***이명수 시인 : 1945년 경기 고양에서 출생/1975 <심상> 등단/ 시집 <왕촌일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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