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구멍 사진기
손택수
벌레들이 정지문에 구멍을 내놓은 거다 그 구멍 속으로 빛이 들어오면
아궁이 그을음이 긴 벽에 상이 맺혔다
나비가 지나가면 나비 그림자가, 마당에 뿌려놓은 햇싸라기를 쪼아 먹는 새 그림자가
살강의 흰그릇들에 거꾸로 맺히곤 하였다
손가락으로 밀면 까무스름 묻어나던 그을음은
불에 탄 짚들이 들판과 하늘을 잊지 못하고 벽에 붙여놓은 필름,
그 위로 떠가는 상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어둠을 더 편애하게 된 것이 아닐까
사내 녀셕이 고추 떨어진다, 할머니 불호령은 늘 두려웠지만
나는 여전히 아궁이 재 속에 묻어놓은 고구마와
솥단지 바닥의 누룽지를 탐하는 부엌강아지
잠을 자다 일어나 나무 속살을 갉아 먹고
나무 속살에 스민 물소리와 볕들을 갉아 먹고
배 부르면 다시 잠이 드는 애벌레처럼
기다란 꿈속에 일 나간 식구들을 기다리곤 하였는데
영사기 필름처럼 차르르 돌아가던 풀무질 소리, 뚝, 끊어진 어디쯤일까
그 사이 암실벽 노릇을 하던 정지벽도 까무룩 사라져버렸고
상할머니 곰방대처럼 뽀끔뽀끔 연기를 뿜어 올리던 굴뚝도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스위치를 올리면 바퀴처럼 단박에 어둠을 내쫓는 한 평 반의 부엌
싸늘한 불빛이 거리를 떠돌다 온 胃를 쓸쓸히 맞이할 뿐이다
문을 닫은 채 웅크려 빛을 빨아들이는 벌레 구멍을 숨구멍처럼 더듬는 밤
하늘에 난 저 별은 누가 갉아 먹은 흔적인지,
구멍 숭숭한 저 별이 빨아들이는 빛은 어느 가슴에 가서 맺히는지
이런 적적한 밤 나는 아직도 옛날 정지를 잊지 못해서
하릴없이 낡은 밥상을 끌어안고 시를 쓰곤 한다
밥상이 책상으로 둔갑하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새근거리는 식구들,
그들 곁에서 쓰는 시가 비록 꼬들꼬들하게 익은 밥알 같은 것이 될 수는 없었겠지만
할머니의 아궁이에서 올라온 그을음이 부엌강아지 젖은 콧등에 까뭇이 묻어날 것 같아선
애벌레처럼 사각사각 연필을 깎으면서
살강의 흰 그릇처럼 정갈하게 놓여있는 종이 위에
어룽거리다가 가는 말들을 찬찬히 베껴 써보곤 하는 것이다
_____<문학의 문학> 2010년 여름호
손택수
__1970년 전남 담양 출생
__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__시집 <호랑이 발자국> 등
'詩읽기·책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본' 외/정숙자 (0) | 2010.08.26 |
---|---|
밥냄새/오탁번 (0) | 2010.08.25 |
사람을 쬐다/유흥준 (0) | 2010.08.20 |
낮술/장승진 (0) | 2010.08.20 |
방어진 해녀/손택수 (0) | 2010.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