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읽기·책읽기

낮술/장승진

섬지기__황희순 2010. 8. 20. 08:31

낮술

 

장승진

 

 

일찍부터 나는 취해버렸다

아내의 손가락 마디 크기의 셋째가

수술대에 올라갔던 아침,

서민 출신 전직 대통령이

새벽녘 절망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내는 풀리기 시작한 마취로

끙끙대며 침대에 몸을 웅크렸고

선명한 이 모든 것들을

저녁까지 부릅뜨고 볼 수 없어

점호 준비 중이던 술병들을 불러

각 잡힌 냉기로 날 식혀야먄 했다

뭘 그리 잘못했는지

멱살 붙잡아 따지고 싶어도

진실은 누구와도 대화를 원치 않았다

슬픔의 밑바닥까지 취하고 나면

세상의 풍경이 새하얗게 지워질까

이야기 없는 꿈만 꿀 수 있을까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사이

영혼을 빼앗긴 술병들이

희망 고지를 주검처럼 뒤덮었고

김치찌개 자국이 붉게 낭자했다

어쩔 수 없는 이 죽음들 앞에서

나는 아군도 적군도 될 수 없었다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전쟁터에서

나는 승전군도 패잔병도 아닌데

부상당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시와시학> 2010년 여름호

 

 

장승진

__1974년 전남 장흥 출생

__2002년 <시와시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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