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
장승진
일찍부터 나는 취해버렸다
아내의 손가락 마디 크기의 셋째가
수술대에 올라갔던 아침,
서민 출신 전직 대통령이
새벽녘 절망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내는 풀리기 시작한 마취로
끙끙대며 침대에 몸을 웅크렸고
선명한 이 모든 것들을
저녁까지 부릅뜨고 볼 수 없어
점호 준비 중이던 술병들을 불러
각 잡힌 냉기로 날 식혀야먄 했다
뭘 그리 잘못했는지
멱살 붙잡아 따지고 싶어도
진실은 누구와도 대화를 원치 않았다
슬픔의 밑바닥까지 취하고 나면
세상의 풍경이 새하얗게 지워질까
이야기 없는 꿈만 꿀 수 있을까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사이
영혼을 빼앗긴 술병들이
희망 고지를 주검처럼 뒤덮었고
김치찌개 자국이 붉게 낭자했다
어쩔 수 없는 이 죽음들 앞에서
나는 아군도 적군도 될 수 없었다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전쟁터에서
나는 승전군도 패잔병도 아닌데
부상당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시와시학> 2010년 여름호
장승진
__1974년 전남 장흥 출생
__2002년 <시와시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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