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詩 비평

우주로 향해 가는 발자국놀이__황희순 시집 『수혈놀이』 서평/김정숙

섬지기__황희순 2019. 2. 27. 14:11

 

우주로 향해 가는 발자국놀이

__황희순 시집 수혈놀이(애지, 2018)

 

김정숙(문학평론가, 충남대 교수)

 

 

 

  황희순 수혈놀이의 시편들은 아슬함과 섬뜩함, 그로부터 야기되는 아릿함과 비릿함, 그리고 슬픔과 고통의 정서로 가득하다. 상처와 소통되지 못하는 상황, 그리움과 이루지 못한 회한의 표정들이 시어에 아로 새겨져 있다. 그 속의 작은 위로와 희망도 감지된다. 시인의 개인사적 아픔을 암시하는 사건으로부터 인간 존재의 근원을 묻는 끈질긴 질문들이 점증된다. 시어와 이미지가 멀리 떨어져 있는 속성들을 결합하면서 긴장감과 얼마간의 그로테스크함을 주조해낸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성질이 만나 긴장감을 형성하는 것, 좋은 시의 조건을 말한 I.A 리챠즈의 고전적인 ‘긴장 이론(tension theory)’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황희순의 시편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형상을 팽팽한 감각으로 구성해 내고 있다. 잊으라 하며 잊지 말라 하고, 침묵으로 말하라 하는 아이러니의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아리며 섬뜩한 이미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시인의 말’은 이 시집의 탄생 스토리를 짐작케 한다. 시인은 무언가를 폐기처분하려고 마음먹었으나 남은 세포의 무한 복제로 그것에 실패한다. 분열과 증식을 거듭하는 세포의 복제력에 의해 별이거나 혹은 새의 먹이쯤 될 것이 생겨나는데, 시인은 그것을 받아 안기로 힘겹게 결심한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의지나 이성으로 막을 수 없는 생명 혹은 생존으로부터 생겨난 불가항력의 소산인 것이다. 대체 시인이 폐기처분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며 세포의 원형을 이룬 ‘핵’은 무엇일까. 시집에 주섬주섬 주워 담은 ‘발’의 정체와 그것을 풀어낸 ‘별’의 의미를 탐색하는 일, 여러모로 이 시집은 시작부터 읽기에로 유혹한다.

 

  강렬한 감각과 놀이의 상상력

 

  이 시집의 강렬한 감각은 놀이적 상상력에 의해 구축된다. 놀이는 삶의 긴장을 풀어주며 이어주는 윤활유이다. 술래가 되지 않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내야 하고 무궁화꽃이 피었을 때는 그 자리에 움직임 없이 멈추어야 한다. 임의의 점 위에 흑과 백의 바둑돌을 교대로 놓으며 벌어지는 바둑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승부놀이이다. 바둑판은 종종 인생으로 은유되며 패착과 포석 그리고 승부수 등의 언어로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모든 놀이는 그것에 참여하는 존재들의 욕망과 상상력으로 작동한다. 시 「데칼코마니」, 「동물원 구경하기」는 서로 마주봄을 통해 나와 너(당신), 그리고 우리가 되는 관계의 속성과 욕망을 환기한다. 비록 서로를 상처 주고 받을지라도 말이다. 곧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는 놀이로써 인간 존재임을 확인한다.

  수혈놀이의 시편들은 직간접적으로 놀이를 통해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거울놀이에 소환된 초파리, 말벌, 고추잠자리, 영양, 바퀴, 꼽등이, 직박구리, 기러기, 무당벌레는 인간의 분신이거나 인간과 대비되는 존재물이다. 시집의 2부가 자연물들의 특이성과 속성을 통해 인간의 이면을 예증하고 있다면, 인간 삶을 담은 영화의 스토리와 대사로 재구성한 3부의 시편들은 관계의 작용과 인간 사회를 되비쳐준다. 시인은 거울놀이와 역할놀이의 변형을 통해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을 매개하고 대리 경험하며 중첩시킨다. 경계(境界)와 ‘사이’의 반복성은 “여기가 이승이자 저승.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사는 곳”(「나머지 사람들」)이라는 시공간(크로노토프)을 재현한다.

  특히 「수혈놀이」는 놀이의 상상력이 극대화된 점에서 주목된다. 피를 받는 놀이라니! 좀 뜻밖이다. 놀이라는 기존 관념에서 벗어나 낯설면서 어딘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놀이의 속성이 그렇듯 어느새 독자는 시인이 건네는 수수께끼 놀이에 계속 동참하게 된다. 상상하는 동안 이미 그 놀이에 빠져들고 만다.

 

  처음부터 우리 사이엔 날선 칼이 놓여있었지 서로를 넘나드는 발자국에 피가 묻어났지 나란히 누워 마주보면 이빨 사이로도 피가 스몄지 그 피 서로 핥아주며 낄낄거렸지 손만 잡아도 상처가 환히 피었지 너의 외로움과 나의 즐거움이 부딪치면 불똥이 튀었지 둘이 머문 들판은 언제나 축제장이었지 불꽃 낭자한 축제에 정신이 팔려 피를 몽땅 낭비해 버렸지 우린 껍질만 남아 밀려다니다 사라졌지 살고 살고 또 살아도 어김없이 혼자라도 다시 살고 싶어지는 12월, 오래 숨겨두었던 마지막 남은 피를 꺼냈지 새싹이 봄에만 돋는 건 아니지

__「수혈놀이」 전문

 

  시집 제목이자 표제작인 이 시에는 카니발적 요소가 짙게 깔려 있다. 일반적으로 수혈은 건강한 사람에게서 채취한 혈액 또는 그 성분을 환자의 혈관 속으로 주입하는 치료법이다. 그러나 시 속 “우리”는 몽환적이며 환각적인 상태에서 “너의 외로움과 나의 즐거움”을 서로에게 주입하며 상처를 남긴다. 일종의 제의의 형식을 띠는, 비정상성에 가까운 ‘수혈’ 행위는 이 시를 통해 새로운 시적 의미를 획득한다. “날선 칼”에 베여 피가 묻어나고 스미고 서로 핥아주며 낄낄거리는 “불꽃 낭자한 축제”의 형상은 공포스럽고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반면 껍질만 남아 사라져가는 모습은 비릿한 슬픔을 자아낸다.

  시적 형상은 정신과 영혼보다는 ‘물질적 육체성’이 우선화된 것으로 바라본 바흐친의 카니발의 세계에 닿아있다. 황희순 시에 재현되는 카니발은 “그들이 떼어간 팔다리머리심장”(「꿈의 뿌리」)의 ‘그로테스크한 몸’과 함께 마지막 남은 피를 꺼내 “새싹”을 꿈꾸는 카니발적 양가성을 주조한다. 이는 12월이라는 시간이 품고 있는 죽음과 다시 “봄”으로 상징되는 생명으로 다시 살고 싶어지는 것에서 발현된다.

 

  암호들과 배치의 역학

 

  카니발로 부를 만한 축제에는 얼마간의 일탈과 전복의 에너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 세계는 우리가 정상이거나 이성이라고 전제하는 것들에 대한 일종의 비틀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근대적 사고에 대한 비판이며 그로부터 배제되고 타자화된 존재의 목소리를 회복하려는 의지와 연결된다. 무한 증식하는 자본의 위력과 억압적 현실에 맞서 시인은 시적 감수성을 복제해 나간다. 아래의 시들에 가닿은 시선들이 이를 증명한다.

 

난도망옮겼습니다목에작별연락주시기바랍니다그녀가시간이되면일일도베트남음식즐길수있다초대했기를기대합니다영광것으로알려져그제공가족의건강과그행복을기원합니다

__베트남에친구 노퐁히엔

 

  평생 헤아려도 모자랄 하늘을 별을 기억의 가지를, 온몸으로 꿈틀거리다 끝날 게 뻔한 소통불가 사랑을 연민을, 쌀국수 먹으러 가자던 약속을, 일당 8만 원 좇아 도망치듯 가버린 이주노동자 등짐 무게를, 부자가 되고 싶은 스물여덟 살 청년의 소원을, 혈세낭비 외유에 신명 난 위정자 뒤통수를, 날개도 없는 전직 대통령을 부엉이바위에서 날아가게 만든 이 나라를, 꽃 같은 아이 수백 명을 수장시키고도 울지 않는 잔인한 권력을, 오렌지만 한 태양을 초속 30Km로 달리는 모래알만 한 지구 대한민국 대전에 잠시 정박한 우주 미립자 나를 또 당신을, 누가 간단히 풀어 읽을 수 있겠는가.

 

  히엔, 그래도 고개 숙이지 마라. 내 형제도 오래전 너희처럼 사막으로 품팔이 간 적 있다.

__「암호들」 전문

 

  「암호들」은 보증 서달라는 손을 뿌리친 다음 날, 현관문에 붙여놓은 띄어쓰기 없는 베트남 청년 히엔의 편지로 시작된다. 시의 화자는 도망자로 내몰리면서도 나와 내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기호를 바라보며 나에게 처해진 불편함과 어려운 상황을 외면했다는 부끄러움을 동시에 떠올린다. 자본이 대주체인 세계에서 사랑과 연민은 소통되지 않는다. 혈세를 낭비하는 위정자와 생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잔인한 권력의 세계 안에서, 그와 무관하지 않을 나와 당신을 “누가 간단히 풀어 읽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어느 틈에 詩가 아득한 거울 속으로 들어가 버린 걸까 거울 속으로 손을 쑤욱 밀어 넣어보았지 뒤죽박죽 잡히지 않는 자음과 모음들, 요즘 누가 詩를 읽기나 하니?”(「詩를 본 적 있니」)라고 말해지는 시의 운명이기도 하다. 이 해독불가능성이 시인이 수혈놀이를 쓰게 된 또 다른 연유일 터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는 “내 형제도 너희처럼 사막으로 품팔이 간” 난민의 공간이다. 이 같은 상황은 자연 생명들을 비켜가지 않는다. 시집 속 새, 곤충, 동물들 역시 두렵거나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직박구리는 고무통에 빠져 비명을 지르고 있고(「직박구리의 거울」), 신호가 바뀌면 꼽등이는 금세 대로에서 바스러질 운명(「꼽등이의 거울」)이다. “두리번대다 지워진 목숨”(「초파리의 거울」)의 존재들은 살얼음판을 건너고 있는 인간의 형상으로 겹쳐 읽힌다. “만만한 목숨이 어디 있겠는가” 시인은 애써 말하지만 “낚싯바늘에 끌려나온 향어”처럼 “삼키면 안 되는 미끼 곳곳에 있어/사람으로 사는 것도 쉽지 않”(「향어의 거울」)음을 처절하게 알고 있다.

 

  어여쁜 조슈아, 이젠 네가 술래 할 차례야. 영영 숨은 네 아비는 나중에 찾기로 해.

  비어져 나온 이 꼬리부터 싹둑 잘라 묻고, 숨어볼까? 흐흐 그래그래, 인생은 아름답다고 했지. 찾으라고 말할 때까지 눈뜨기 없기. 몸 숨길 만큼 땅 파낼 때까지 찾기 없기.

  흡, 숨소리도 내면 안 돼. 더 꼭꼭 숨어야 해. 누가 뭐래도 살아남아야 하니까.

__「인생이 아름다워?」 부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 대한 응답이자 또 다른 질문을 던지는 시 「인생이 아름다워?」는 인생이 살아남기 위한 모든 게임임을 말한다. 시는 언어로 직조된 세계이다. 암호화된 것을 푸는 해독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열리는 의미의 구조물이다. 시인과 독자는 서로가 지닌 것들로 완전하게 비밀이 풀리길 바란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고 있는 세상은 비밀번호(통과의 말; 패스워드)를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시적 화자는 그들이 처한 위기의 순간에 개입하지 않거나 애써 잊어야 한다고 되뇐다. 그러면서도 살아남아야 하므로 시인은 약한 존재에게 절체절명의 순간이 와도 “고개 숙이지” 말라고, 숨소리도 내지 않고 “더 꼭꼭 숨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들아, 어미가 범죄를 저질렀구나

이런 망할 놈의 세상에 생명을 탄생시키다니

고뇌를 겪게 하다니

인생은 이유 없는 시작의 연속

반복되는 춤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돼

라라라, 멈추지만 않으면 돼

__「Last Holiday」 부분

 

  영화 <Last Holiday>와 <안토니아스 라인>의 대사를 재구성한 「Last Holiday」 또한 쇼펜하우어의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야, 세상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것만 모여 사는/ 고뇌하는 영혼과 악마로 가득한 지옥’이라는 비극적 세계인식이 더해져 인생의 참혹성과 허무함을 말한다. 또한 “인생은 이유 없는 시작의 연속”인 까닭에 그 무한한 반복성을 두려워하거나 멈추지만 않으면 살아낼 수 있다는 위로를 건넨다. “행복과 모험은 같은 혈통”이며 “시작은 언제나 함정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기다리는 것도 꿈의 일부/ 꿈이 어긋나더라도/ 쿨하게 돌아서기, 그리고/잊기”(「에필로그」)도 필요하다.

  거울놀이와 역할놀이를 포함해 암호놀이와 숨바꼭질놀이 모두는 곧 배치의 문제이다. 배치는 누가 어떻게 보는가 하는 시선이며 권력의 영역이다. 시인은 그것의 바꿈을 통해 기존의 것을 성찰하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되기’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물(thing)은 비로소 존재(being)로 변화한다.

 

  별로 향하는 발자국

 

  수혈놀이는 질긴 인연과 고통의 시간을 지난 후 맞게 된, 그리고 깨닫게 된 ‘이후’의 마음의 풍경을 보여준다. 시적 주체는 멈추거나 침묵하거나 울음으로써 긴장감을 이완시킨다. 시집 후반부의 시편은 슬픔 후의 맑고 투명한 안도감으로 다가온다. 바람이 잠시 머물다 떠난 그 자리가 생인 것처럼, 시인은 지나온 자취를 바라보고 놓아준다. ‘흔적’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기억하는 존재 방식이다. 시인은 정체성과 치열하게 대결했고, 그래서 치열함을 지난 후의 홀가분함과 담백한 목소리로 또 살아갈 수 있다.

 

  머리맡에 수백 개 별이 떠있었어요 한 달에 꼭 한 개씩 따먹었지요 반짝이는 별을 따먹어도 고단한 허기만 몰려왔어요 뱃속에 열 달 머물다 나온 특이한 별도 있었어요 희망이던 그 별은 하늘로 갔어요 하늘로 간 별은 무엇이 되었을까요

   이러구러 바장대다 보니 한 개 남았더군요 가물거리던 별마저 간밤 홀랑 먹어치웠어요 머리맡이 이제야 정갈해졌어요 무엇을 그려 넣어도 어울리는 어둠이 되었어요 별을 지키던 얼굴은 낡아 눈만 남았네요 퀭한 그 눈을 통과해야 한대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뒤따라오는 발자국 지울 지우개가 필요해요

  거기, 누구 없나요?

__「별의 변주__空無路程」 전문

 

  시편들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별’은 지구, 이상향 등 시인의 마음결에 따라 변주된다. 그 중심엔 그리우나 애써 놓아야만 하는 “사랑스런 너”(「나머지 사람들」)가 있다. 지상의 꽃으로 피었다가 서둘러 하늘의 별이 된 너를 생각하며 시적 화자는 깊은 밤 쓸쓸하고 나직하게 지나온 시간을 읊조린다. 고통의 시간을 복기하는 고백성사와 같은 독백의 말들은 뒤따라오는 “발자국”을 지워가는 일과 병행한다.

  시집에서 인간의 ‘발’은 전작 시집에서 주목 받은 ‘뱀’의 형상과 겹쳐 읽을 때 한층 깊게 이해된다. 신의 저주로 단맛을 빼앗기고 뱀 곁에서 뱀처럼 기어 다니게 된 뱀딸기는 발을 잃은 복수로 “저를 탐한 어린 내게 덤터기를 씌”(「蛇足之夢」)움+으로써 “사람시늉”을 오래도록 하고 “사람으로 둔갑한 나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 인간과 뱀의 경계에 놓인 나의 존재성은 훨훨 춤을 추는 “밤”에만 빛나는 비늘로 드러난다. 시 속 뱀에 얽힌 전설과 꿈은 낙원에서 인간을 추방시킨 성경의 서사를 환기하고, “내 눈, 똑바로 보라니까”라는 명령의 언어는 자신의 눈을 보는 순간 인간을 돌로 변하게 만드는 그리스신화의 메두사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욕망과 금기의 환상으로 촉발된 “비어져 나오는 발”(<시인의 말>)은 인간임을 선택하는 기호이며, 흔적을 남기는 발자국은 살아있음의 징표이다.

  시에는 땅=발=이승과 하늘=별=저승의 시공간적 계열체가 교차하고 있다. 인간의 유한한 생과 우주의 무한한 시공이 아득하게 대비된다. 한계와 초월, 인생이라는 혼돈(chaos)과 질서(cosmos) 사이를 내딛는 수많은 발자국(chaosmos)이 인생임을 담담한 어조로 들려준다. 별의 생과 멸은 직선적인 시간성에서 순환적인 영원성으로의 이행을 표상한다. 별의 변주처럼 때로 갈팡질팡하거나 멈추거나 내딛는 발자국의 형상이 한 사람 한 사람이 걸어온 인생지도이다. 여기에서 시인의 인식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시적 화자가 말해주듯 허공에는 길이 없다. 굳이 비어있는 그곳에 끝내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를 정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소멸하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그려 넣어도 어울리는 어둠”이 있기에 별이 아름다운 것일는지 모른다.

  황희순의 시적 윤리는 이처럼 끊임없이 비워내고자 하는 고투에서 획득된다. 껍질로 남을 때까지 피를 빼내고, “나, 곧/ 껍데기만 남을 게 뻔하다//이제야 비로소 내 몸에/무엇이든 담을 수 있”(「耳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지위를 낮추고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으며 혼돈 자체를 직시하는 시적 태도로 해서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이 발현된다. 뭇 생명에 대한 관찰과 예민한 감지를 통해 인간 존재를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비워내고 사라지는 과정[空無路程]이 인생의 길임을, “거기, 누구 없나요?”라는 실존적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묵직한 울림과 함께 인생의 비의에 공감하게 된다.

 

이봐요,

자기 가슴을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는 거 아니에요

그 안에 바닥없는 벼랑이 생길지 몰라요

다시 살고 싶어져도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어요

움푹 파인 당신의 절망과 절망과 절망 사이

계단이 있어요, 벼랑이 보이기 전에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서요

이 땅에 사람답게 필 기회

꼭 한 번뿐이에요

어서요

__「자폐」 전문

 

  시편들의 분위기로 볼 때 「자폐」는 따듯한 시선과 삶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담은 아름다운 시다. 시적 화자는 자신의 가슴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한 사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 생겨날 “바닥없는 벼랑”을 감지한다. 벼랑 끝에 서는 일만큼 두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공포를 감당할 수 없을 때 존재는 눈을 감고 마음을 닫고 심연 속으로 들어간다. 그 사람은 「J의 모서리」의 “흰 와이셔츠 안에 자신을 가”두는 J처럼 “한 계절도 한 마음도 온전히 움켜쥐어 본 적이 없”이 “이번 生도 주춤대다” 말 것이다. 시인은 스스로를 유폐시킨 그가 벼랑에 이르기 전 절망과 절망 사이의 계단을 밟고 올라와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란다. “사람답게 필 기회”와 혹독한 시간을 감내한 후에 맞는 ‘봄’이 그에게 찾아와주길 기다리고 있다. 세계와 단절된 인생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것은 시인이 겪었을 유배와도 같은 고통의 편린들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는 황희순 시편들이 비극적인 세계 안에서도 여전히 지속적으로 작고 미세한 희망을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서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서”라는 요청은 시인을 포함해 아프고 상처 난 인간 존재에 보내는 곡절한 마음이다.

  지금까지 시집이 건네 온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끝없는 이 미로를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영양의 거울」)의 물음과 그 답을 구하기 위해 시인과 함께, 때로 묵상하듯 홀로 걸어온 듯하다. 인생의 은유인 놀이가 서로의 패를 보여줌으로써 지속된다는 것, 이기거나 져주고 때로는 비기며 서로를 지탱하게 하는 힘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시집 수혈놀이의 미덕은 아픔과 상처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놀이의 상상력을 통해 인간의 허위와 자본 우위의 근대적 폭력성을 비틀며 회복하려는 탈주의 과정을 형상화한 데에 있다. 기웃대고 부대끼며 살아가고 또한 아름답게 소멸해 가는 공무노정(空無路程)의 윤리가 따듯한 위안을 전해준다. 인간은 우주를 향해 발자국놀이를 하는 존재이다.◈

 

***<시화문화> 통권 49호. 2019.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