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읽기·책읽기

구름의 증식/이근일

섬지기__황희순 2013. 5. 1. 10:38

 

        구름의 증식

 

이근일

 

 

 

 

우리가 잃어버린 나날이

어느 날 갑자기 몰려와 눈길을 하얗게 물들일 때가 있다

 

낯설고도, 익숙한 나비 떼의 습격처럼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던

우리의 눈동자가 빛나는 순간

 

같은 곳의 하늘에 떠 있던,

암울한 미래를 예감하는 구름들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침식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진 채

오래도록 썩지 않고,

살아 있음을 견딘 나날들 그래서

언젠가 영혼을 잃고, 박제된 나비들의 환영이

잠시 현실을 잊은 우리의 웃음 속에서 하얗게 눈뜬 것일 테지만

 

그것이

침식이라는 착각을 뭉개며

구름들이 다시 빠르게 증식하는 동안

 

왜 삶이 자꾸 우리에게

착각을 선물하는지 묻지 않는다

오히려 더 침묵할 뿐 현실 속에서

다만, 우리는 침묵할 뿐

독기 서린 그 침묵의 손짓으로

가만가만 잔재하는 환영의 날개를 부스러뜨릴 뿐

 

나비 떼가 걷히면

우리의 눈길은 곧

책망하듯 서로 다른 곳을 향한다.

 

(천년의 시작, 2012. 겨울호)

 

_____<시로여는세상> 2013. 봄. '계절의 좋은 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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