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임강빈 선생님과 나/황희순

섬지기__황희순 2006. 11. 12. 15:15

임강빈 시인/2006.10.31/박용래 시비가 있는 사정공원  (c. 황희순)

 

 

선생님 모시고 사정공원 박용래 시비에 갔다

몇 년 만인가, 해마다 이맘때

붉게 물든 단풍잎이 박용래 시비 어깨를 덮을 즈음 막걸리 한 병 들고

선생님과 둘이 888번 버스를 타고 다녀오곤 했었는데

선생님 건강이 좋지 않아 한해 한해 건너뛰다 보니 한 3년은 그냥 지나갔나 보다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비 앞에 자리를 펴고

박용래 선생님 시비 앞에 한 잔 가득 따라놓고

선생님 두 잔 드시고  내가 다 마시고 그만 취해 버렸다

선생님 돌아가시면 이곳에 시비를 세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만

어디 그게 내 생각대로 되겠는가

선생님은 박용래 시비 세울 때도 어려웠는데 어림도 없을 거다 하셨다

비둘기들이 우리가 먹는 새우깡을 달라고 주변을 맴돌았다

선생님이 재미가 있으신지 연신 새우깡을 던지셨다

 

이제 몇 번이나 선생님과 함께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점점 기력이나 기억력, 판단력 등이 눈에 보이게 떨어지신다

세월을 거스를 장사가 어디 있었던가

사진 몇 컷 선생님 몰래 찍었는데 좋은 사진 건졌다

요즘 선생님 작품 발표 때 쓸 만한 사진이 없어

아니 새로운 사진이 없어 재미없었는데

우선 리토피아 2006 겨울호에 새 사진을 쓰고

원고 청탁 오는 곳 있으면 차례로 새 사진을 보내야겠다

 

아래 글은 박용래 선생님과의 추억을 쓰신

선생님 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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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龍來, 그리고 우정

임 강 빈


올해가 박용래 시인의 20주기가 된다.
'박용래 이야기'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쓸 내용이 많을 것 같았는데 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세월 탓일까.
시인은 시만 쓰는 것으로 행복하다. 무슨 명예나 돈을 탐하랴.
이 땅에는 시가 많고 따라서 시인 또한 많다. 시를 필생의 업으로 하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시인이란 이름만 빌리고는 사라진 사람도 적지 않다. 유명 무실한 시인이 많고 그 부침(浮沈)이 심하다.
박용래 시인은 살아서 이름을 얻었지만 사후에도 명성이 높다.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했고, 시선집 『먼 바다』, 산문집 『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이 간행되었다. 한국일보에 「문학사 탐방」, 대전일보에 「충청의 예맥」, 「작가의 땅」 등 그의 문학과 인간이 조명됐다. '새여울' 동인지에서 「시인은 죽어서도 외롭지 않다」가 특집으로 다루어졌으며, 각 문학지마다 박용래 실명(實名)의 시가 이십여 편 발표되었다.
1984년 10월 27일, 보문산 사정공원에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다.
1999년에는 〈박용래 문학상〉이 대전일보에 의해 제정되었다.
이렇게 그는 갔지만 외롭지 않게 빛나고 있다.

1956년 박용래 시인과 나는 다같이 《現代文學》지를 통해 문단에 나왔고, 똑같이 박두진 선생의 추천을 받았다. 그리고 고향도 백제의 고도인 부여와 공주, 나이는 그가 다섯 살 연상이다. 이런 저런 연유로 해서 문단에서는 가까운 사이로 보고 있다.
그와의 상봉은 대전에서였다. 가파른 언덕을 기어올라서 그가 재직하던 대전철도학교에서 만났다. 첫인상은 허약해 보였다.
반년 후 내가 대전으로 옮기게 되어 자주 그와 만났다. 술자리도 잦아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강경상업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정구 선수이면서 미술반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다재 다능한 학생이었으며, 대대장으로 열병이나 분열식을 할 때 그의 호령은 쩌렁쩌렁 교내가 울렸다고 한다. 잘 믿어지지 않지만 그의 학우나 후배들의 말이 한 가지로 나오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가 졸업한 해는 1943년이었다. 군산으로 가서 은행 시험을 치르고 곧 조선은행에 근무했고, 다시 대전으로 옮겼다. 해방과 함께 돈 세는 일이나 돈 냄새가 역겨워 은행을 그만두었다. 그 좋은 자리를 팽개쳤던 것이다. 시인 되기를 예약한 셈이라고나 할까.
술자리에 마주 앉으면 간간히 소운을 만났을 때의 감격담, 목월을 만나 시인 지망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말, 그리고 홍래(鴻來) 누나 이야기를 하다가는 눈물을 쏟곤 했다.
후에 「나의 시적 편력」에서 그는 단편적으로 내게 들려주었던 것을 이렇게 정리해 놓았다.

동래(東萊)에서 김소운 선생이 문인부락(文人部落)을 세울 예정인 바 뜻있는 청년은 연락을 바란다고 했다. 넓은 천지에 내 갈 곳은 여기밖에 없다는 일념으로 경부 열차에 올랐다. 선생은 시인이니까 대나무 숲이나 솔밭 머리에 살고 계시리라 믿었던 나는 그런 곳만 샅샅이 누볐으나 헛수고였다.

못견디게 슬픈 날은 대구로 서울로 목월 선생을 찾았다. 말없이 길을 가다가도 손을 꼭 쥐어주시는 선생에게 나는 얼마나 많은 위안을 받았는지! 시도 못 쓰고 생활도 없는 나는 답답한 존재였으리라.

청년 박용래의 방황과 시에 대한 갈구(渴求)가 체온에서 묻어나온다. 김광림 시인은 동아일보 지면에 「이달의 시」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 대전이란 묘한 곳이다. 한성기, 박용래, 임강빈 등 착하고 알뜰하기만한 시의 모범생만 가졌으니. 그러나 이들에게 개구쟁이 같은 현대시의 실험의식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것은 팔자만의 소망일까.

적절한 지적이다. 이 세 사람의 빛깔은 조금씩 달라도 서정성이란 토양은 같다고 본다. 박용래는 일본의 하이쿠[俳句]나 센류우[川柳]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다. 그의 서가에는 石川琢木, 北原白秋 등의 시집이 꽂혀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언어를 아낀 사람이다. 시어를 조탁하듯 했다. 언어 하나 헤프게 쓰지 않았다. 경제적인 시를 썼다. 적은 언어로 큰 울림을 주는 시를 썼다. 엽서 한 장 쓰는 데도, 단순한 구문 한 줄 쓰는 데도 전력 투구했다. 쓰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한 시인이다.
그는 실격(失格)한 가장이었다. 무능했다. 아이들은 늘고 자랐다. 학비는커녕 용돈도 한푼 집어줄 위인이 못되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당진 송악중학교 부임이었다.
아이들은 환호했다. 잔소리에서 해방되었고, 술주전자 앞세우는 일도 없어진 것이다. 토요일 집에 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창밖에 봄비가 내리네요. 꽃망울이 곧 터지겠지. 공연히 마음이 설레서…….'라든가. '단풍이 타고 있네요. 지는 날은 슬퍼질 텐데…….'라든가, 무슨 시 구절 읊듯 얌전한 통화가 오면 술 생각이 간절하다는 신호였다. 다른 곳에 전화 걸다 보면 '찌― 찌―' 통화 중일 때가 있어 짜증스럽지만 그와는 언제든 시원히 뚫렸다. 하루 종일 집을 지키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남들은 직장에서 풀려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에 그는 출근을 했다. 그래서 대개는 퇴근길에 자주 만났다. 그는 취하고 싶은 것이었다. 흥이 났다 하면 언제나 그의 독무대가 되었다. '임선생'이 '임형'으로, 나중엔 '임마'였다. 이런 호칭으로 그의 취기가 얼마쯤인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남들이 노래하면 발가락을 세워 바레풍을 춘다든가, '눌더러 물어볼까. 나는 슬프냐' 등의 자작시를 줄줄 외우고 '홍래 누나'가 나오고 끝내는 울음이 터지는 것이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술자리가 고요히 끝나는 경우가 드물었다. 눈치빠른 친구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이때 나는 인내가 필요했다. 냉큼 자리에서 일어설 것 같지가 않아 사정사정 강청할 수밖에. 그러면 그는 "임마 나 돈 있어." 하면서 꼬깃꼬깃한 지폐 한 장을 바지 새끼주머니에서 자랑하듯 내보였다. 고료로 받은 비상금이었다. 그리고는 '멋도 낭만도 모르는 놈들'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술자리 풍경은 대개가 이러했다.
그의 집에 가면 대개 작취미성일 때가 많았다. 거의 팬티바람이었다. 집안인데 어떠냐고 짐짓 진지했다. 매일같이 취중인데 그 짓은 언제 치르냐고 물으면 자못 신파조로 "야, 너 그것도 모르냐? 아, 황홀해." 했다. 그는 술은 친해도 여자하고는 멀었다. 대신 미소년(美少年)을 좋아했다. 반반하다 싶으면 얼굴을 비벼댔다. 그 억센 수염으로 마주 비벼대는 것이다. 아마 이렇게 당한 사람이 상당한 걸로 알고 있다.
문협 주최로 보문산 음악당에서 백일장 행사가 있었다. 대전의 터주노릇을 하는 그를 심사위원에서 뺄 수는 없었다. 오후가 되자 점심때부터 마신 술이 벌써 취해 있었다. 그는 열외로 밀렸다. 행사를 마치고 내려가는 일행 중에 제일 늦게 두 사람이 뒤로 쳐졌다. 비틀거리는 그를 붙잡고 한마디 쏘아붙였다.
"이젠 아주 시를 버릴 작정 했어?
"……?"
"죽으면 그만이야. 쓰고 싶어도 못 하잖아."
"얼래, 참 이상한 말 하네."
"시비(詩碑) 어디가 좋을까. 이 보문산 어때?"
"필요없어. 저 아래 가서 술 한잔 사라, 임마."
우린 이렇게 씨부렁거리며 억지로 내려왔다.

1980년 여름, 밤 10시가 넘어서 전화 벨이 울렸다. 다급한 부인의 목소리였다. 불길한 생각이 순간 스쳤다. 병원으로 달려갔다. 윤화(輪禍)였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골절상이었다. 젊은 화가와, 한성기 시인이 살고 있던 진잠엘 갔다가 부재중이라 허탕치고, 막걸리 몇 사발 걸치고 소낙비를 맞으며 귀가하던 길에 집앞 횡단로를 건너다 택시에 치었다고 했다.
응급 치료를 받고 엑스레이를 찍었다. 그 상황에도 택시 기사의 신변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를 보고 꼭 어린애 같다고 간호사가 말했다. 그는 "음, 그래 나는 막내둥이라서……." 했다. 순진한 그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다리에 기브스를 했다. 병실로 옮기면서 다리를 쳐들어 보이며 "어때, 나 비너스 다리 같지?" 하는 바람에 또 한바탕 주변 사람을 웃겼다.
이 일로 해서 그 뜨거운 여름 석달 동안 또 새장에 갇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갇히는 것에 익숙한 그였지만 답답해 했다. 창밖의 구름을 바라보며 노을빛에 흥분도 하며 시상을 가다듬기도 했다. 머리맡에는 만년필과 종이가 항시 준비되어 있었다. 자기 성찰의 좋은 기회로 삼았을 것이다. 그는 과작(寡作)하는 시인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많은 작품을 생산해 낸 것으로 안다.
퇴원 후에도 얼마간 집에서 요양을 해야 했다. 목발 신세였다. 아마 이 동안이 술과 떨어져 산 가장 긴 시간이었으리라.
보고 싶은 얼굴이 떠오르면 만나자고 했다. 교외로 나가 바람이나 쐬기를 원했다. 사고가 났던 횡단로도 둘러보았다.
1980년 11월 21일, 내가 근무하던 학교 교무실 책상 위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하직했다는 떨리는 목소리였다. 순간 덜컹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나와 함께 근무하던 그의 서랑(壻郞)을 쫓다시피 보내고 뒤따라 달려갔다. 혹시나 했지만 사실이었다. 심장마비라 했다. 칠성판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흰 천을 들추고 그를 보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주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죽음은 이렇게 평온한 것이구나.' 하고 속으로 몇 번을 되뇌이고 있었다.
빈소에는 젊은 시절의 사진에 검은 리본이 걸리고 새 구두가 밑에 놓여 있었다. 늘 노래해 왔던 탐라행(耽羅行)을 위해 부인이 마련한 새 구두였다.
대전 근교 산내에 있는 천주교 묘지에 묻었다. 그를 아끼고 따르던 오열하는 긴 행렬을 뒤로한 채 그는 조용히 묻혔다.

가을 바람 마른 풀숲 속 눈물 말리고 있을까/ 혼자 삐쳐 소줏잔 홀짝이고 있을까/ 지상의 주소를 잃은 龍來의 눈물이/ 잘 울지 않는 剛彬을 울리고 있었다
― 나태주 「우정」

해마다 한두 번은 그의 시비를 찾는다. 처음 세울 때는 공원 조성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라 나무도 어리고 어설퍼 보이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16년이 되었다. 나무도 빽빽해졌고, 새들의 지저귐도 끊이질 않는다. 시비 뒤로 심었던 적단풍이 지금은 주인의 키를 훌쩍 덮고 있다.
시간이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2000 <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