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詩 비평

<서평 묶음> 시집 <새가 날아간 자리>/박선영, 강원갑, 남기택, 강경희

섬지기__황희순 2006. 9. 2. 20:21

 

 

고통의 흔적

박선영|문학평론가

 

 

1.

운명이 고통을 동반해 엄습하면 누구나 한 마리 짐승처럼 상처를 핥는 데 몰두한다. 절대적인 아픔과 긴장 속에서 인간은 신음을 토하며 웅크리거나, 울부짖으며 고통의 원인을 향해 돌진한다. 자극과 반응의 쉼 없는 상호작용 사이에 두뇌가 끼어들 여유는 거의 없다.

황희순 시인의 시집 <새가 날아간 자리>는 고통의 공격에 직면한 자가 보여주는 본능적 몸부림과 흐느낌의 기록이다. 그가 감당해야 할 딜레마는 즉물적 고통이 사라진 후에도 아픔은 더욱 생생하게 지속된다는 점이다. 고통이 갑작스럽게 닥쳐온 상실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부조리에 대한 원망이든 자학이든 그 무엇인가를 잡아 상실과 부재 앞에 세우고 단죄해야만 그는 슬픔의 늪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시인은 링 위에 올라 뻥 뚫린 부재를 향해 쓰러지는 순간까지 주먹을 휘두른다. 자신이 휘두른 펀치에 얼얼하게 가슴을 맞고 비틀거린다. 벨이 다시 울리고 쉽게 끝나지 않을 이 싸움은 계속 반복된다.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고 이를 악무는 고투는 처절한 비극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지루한 싸움 끝에, 이윽고 눈물을 닦고 고독한 링에서 내려오며 스스로에게 내미는 화해의 손길이 아프다.

처절하게 흐느끼는 자에게 다가가 고통이야말로 삶을 성숙하게 할 것이라 위로를 건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선인가. 지금도 “시들지 않는 지겨운 상처”(「시들지 않는 꽃」)가 줄줄이 절망을 낳고 있는데 말이다. 절망의 흡반은 동정 없이 삶의 혈액을 빨아 멍자국을 남긴다. 고통은 “잘라도 잘라도 시퍼렇게 싹 돋”(「봄은 무덤이다」)고 “아무리 도려내도, 넘치고 또 넘쳐”(「버려진 신발을 보면 뒤집어보고 싶다」) 그만큼 다시 차오른다.

 

오래 전 깨뜨린 유리컵이 방구석에 뿌리를 내렸다 잠자리에 들면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살을 찌르며 몰려다닌다 밤마다 오도가도 못 하는 피투성이 시간이 상처를 통과한다 팔다리 잘린 몸통이 어둠에 둥둥 떠내려간다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다 잠에서 깨어보면 눈을 부라린 유리조각이 내 목을 노리고 있다 매일매일 자라는 저 유리조각, 뽑아버리고 싶은 고장 난 신호등

―「파란불이 켜지지 않는 방」 전문

 

상실이 낳은 고통에서, 아픔은 상실한 그 순간이 아니라 시간이 흐른 후 부재를 실감할 때 정점을 찍는다. 날선 고통은 부재를 사무치게 확인할 때마다 칼날을 더욱 단단하게 박는다. 깨뜨린 컵은 오래전에 치웠지만 뽑아낼 수 없는 유리 파편들에 찔린 몸과 마음은 출혈과 지혈을 반복하며 곪아가고 있다. 영원히 익숙해질 수 없을 거라 약 올리듯 날을 박는 고통이 “고장난 신호등”처럼 붉게 충혈된 눈을 번득거린다. 묵은 시간의 기억들은 잘려나간 손과 발을 타고 새롭게 살아나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있다. 상처로 가득 찬 기억의 반복은 죽음의 충동마저 불러일으킨다. 고통의 책임을 안으로 돌려 자기에게 참혹하게 복수하거나, 스스로를 자책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일하게 만들어버리는 기억의 칼로부터 면제도 회피도 불가능한 자아는 매번 비정함만을 맛본다. 날을 세우고 달려드는 기억 앞에서 그는 “사방팔방 부서지지 않는 저 두려운 것들/어떻게 뚫고 나갈까”(「회귀를 위한 변명」)라고 엎드려 자조한다.

또한 고통은 무기력이라는 낯선 얼굴을 끌어내고 있다. 끈질기게 들러붙는 아픔 때문에 주체는 삶의 주도권을 조금씩 잃어가고 만다. 생의 주도권을 갖고 있을 때 인간은 희망을 품고 미래의 꿈을 부풀린다. 하지만 수긍할 수 없는 압도적 부조리와 마주할 때는 어떠한 의지도 결국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지속적 고통이 보호의 방어막을 깨부술 때, 상처가 노출된 자는 적극성을 빼앗긴 채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강요된 수동성으로 인해 자아는 “이건 정말 꿈일지도 몰라요”(「꽃에 찔리며 살아요」)라며 현실을 부정한다. 부정은 존재감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부재중인 채 똑같은 하루가 꿈처럼 흘러가”(「지금은 부재중이오니」)고 있다며 자기가 부재하는 것인지 세계가 부재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한다. 한편으로는 “나를 구석구석 더듬어보”(「다시, 상처 핥기」)거나 “손바닥이 얼얼”(「또 한 계단 내려서며」)하도록 내리칠 때 느껴지는 감각으로 살아있음을 확인하기도 한다. 이러한 불안은 대상의 수나 양, 질감을 반복적으로 세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정류장에 줄선 사람을 세고 쥐똥나무 열매를 세고 뉘엿뉘엿 지는 해를 세”(「꼬깃꼬깃한 하루」)는 행위로 실감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 멈춘 시간에 목 졸리고 슬픔에 미래를 저당 잡힌 채 과거의 미로 속을 헤매던 자아는 고통의 뿌리를 뽑기 위해 기억 이곳저곳을 파헤친다. 상실의 근본 원인을 찾아 자신을 둘러싼 관계와 감정 속으로 치밀하게 파고 들어가 본다. 그러나 과거로의 탐색은 “나는 아버지의 실패작”(「나는 실패작」)이고 “잡종”(「개가 늑대처럼 울어」)이라는 자조만을 불러오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자조는 자신의 삶이 원래 산산조각 나도록 예정되었을 거라는 무력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시간은 혼란 속에서도 감정의 높낮이와 망각이라는 옷을 번갈아 갈아입는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는 조각난 삶의 퍼즐을 끌어 모아 다시 맞추고, 어떻게든 상실을 메꿔 간다. 이때 살아있음은 상처의 산패를 막고, 발효시켜 줄 강한 힘을 제공하고 있다. 자아는 상처도 “먹으면 약이 된”(「벌레 먹다」)다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망각에서 재생의 동력을 구하려 한다.

 

슬프다는 것, 처음엔

뽑아버리고 싶은 이물질이다가

언제부턴가 들여다보며 살더라

깊이 박힌 못처럼 숨조차 쉴 수 없던 것이

점점 헐거워지더라, 헐거워진 그곳으로

숨을 쉬더라

―「기억의 중심」 부분

 

고추 몇 포기 심은 8층 베란다 화분에 엄지손톱만한 청개구리 한 마리 앉아 있다 창문도 꽁꽁 닫아 놓았는데 이 한밤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인연이 닿으면 생명도 전깃불 켜지듯 홀연히 켜지는 것일까

언젠가 만져본 듯한 보드라운 살 두 손 오므려 받쳐 들고 풀밭 찾아서 가는 길, 꼬무락꼬무락 손가락 사이를 헤집는다 깜깜한 나도 불이 켜지려나, 정수리가 따듯해져 온다

―「한여름 밤의 꿈」 전문

 

위의 두 편의 시에서는 단단히 똬리를 틀었던 모멸과 부정이 자기연민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슬픔과 동거하려는 극복의 기미까지 내비친다. 이러한 시도는 이제 그만 기억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뒤틀어진 내면을 매만지려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스스로 작아질 만큼 작아진 후, 그 “헐거워진” 틈새로 조금씩 숨을 쉬며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청개구리의 “보드라운 살”은 잊고 있던 기억 속 생명의 감촉을 불현듯 떠올리게 한다. 타자의 불완전함을 받쳐 든 자아는 그 감촉으로 인해 비로소 “정수리가 따뜻해져” 옴을 느낀다. 고통을 지고 미로를 헤맨 자의 자격으로 그는 자신의 슬픔을 연민으로 전환한다.

상처받은 자가 어둠 속을 헤매며 얻는 것은 비극의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혼란스런 미로에서 절망한다 해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영영 갇히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간다. 세상은 늘 떠나가는 사람과 떠나보내는 사람의 눈물로 젖어 있다. 이제 그는 젖은 눈을 들어 빛이 새어나오는 출구를 조심스레 기웃거린다.

부조리, 우연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변수들을 제거할 수 있다면 과연 생은 완전해질까. 누구도 고통을 피해가지 못한다는 삶의 불완전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닐까. 고통 없이 완전하다면 우리는 각자 혼자만의 공간 속으로 들어앉게 될 것이다. 자신의 불완전을 통감한 자만이 타인의 불완전에 연민의 눈길을 보낼 수 있다면 고통이야말로 생의 필요조건이리라. 황희순 시인의 시편들은 절망으로 체온을 높여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따뜻함을 담고 있다.

--<2007, 리토피아, 겨울(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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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로 지은 언어의 집

― 몸 안의 말, 몸 밖의 시

 

강 원 갑

 

 

1

인간은 누구나 상처를 안고 있다. 그 정도만 다를 뿐 가슴 속에 아픔을 간직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다. 그런 점에서 인간에게 상처는 일종의 숙명인 셈이다. 이러한 상처는 부조리에 연유하는데 그것은 실존을 둘러싼 내․외적 조건들이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부조리한 사회 속에 던져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르트르는 <구토(嘔吐)>에서 마로니에 나무의 뿌리와 같은 ‘사물 그 자체’를 직시할 때에 그 우연한 사실성(事實性)이 부조리이며 그럴 때에 인간은 불안을 느낀다고 한다. 카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그것을 다시 진일보시켜 부조리란 본질적인 관념이고 제1의 진리라고 하면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태도로 규정하였다. 다시 말해 인간세계에 있어서의 존재, 즉 인생 자체가 부조리인 셈이다. 이는 인간의 합리성과 세계의 불합리성 사이에 늘 모순이 늘 존재함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실존’이란 다름 아닌 부조리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존재라 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인간에게 피치 못할 숙명으로 주어진 부조리를 누구나가 언제나 느끼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이러한 부조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가령, 관습적이고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생활, 꿈꾸었던 이상이나 희망은 사라지고 삶에 뜻이 있는지 없는지도 문제 삼지 않는 무의미하고 건조한 생활 등이 이러한 경우이다. 주목할 점은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주장이 부조리한 세계에 대하여 좌절을 각오하고 인간적인 노력을 거듭하여 가치를 복권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부조리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굴러 떨어질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땀 흘려 바위를 굴려 올리려는 존재, 결국에는 죽고 말 허무한 존재이면서도 열심히, 삶을 의미 있게 살아내려는 존재가 시지프스이기 때문이다.

세 시인의 시집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시지프스’라는 인물이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 시인의 경우도 부조리와 부조리한 세계를 인식하고 그로 인한 상처를 끌어안으며, 이에 대항하여 인간적 가치를 복원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인간 세계의 부조리와 실존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이들의 언어는 몸의 언어라 할 만하다. 그 안에서 상처는 곪아 터질 때까지 삭히고 삭혀진다. 이런 과정을 거쳐 피고름이 나올 때 그 상처 위로 새살이 돋아난다.

(……중략……)

한편 황희순 시인이 느끼는 부조리는 어린 시절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 체험은 유년 시절 가족사와 관련되어 있다. 어린 시절 가족과 관련된 체험은 무의식 속에 남아 있어서 그 모습을 불쑥불쑥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그것이 아픈 상흔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일종의 각인 효과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은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가치관에 영향을 미친다. 다음 작품의 경우가 그러하다.

 

가랑잎 쌓인 산책길

새털 몇 잎 흩어져 있다

 

그날, 콩마당질하던 해질녘, 아버지의 여자 때문에, 머리채 뒤잡혀 사립문 밖으로 끌려 나간 언니, 나뒹굴던 마당귀, 감나무 밑, 홍시 짓뭉개져 있던 거기, 한 움큼 뽑힌 머리카락, 콩깍지 밟듯 밟고 서있던 아버지, 등뒤, 풀썩 쓰러지던 어머니, 그림자, 흰 고무신 한 짝 뒤집혀 있던, 그 자리,

 

간밤, 새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새가 날아간 자리」 전문

 

이 작품에서 화자는 ‘새털 몇 잎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사건의 발단은 ‘아버지의 여자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언니’가 ‘머리채 뒤잡혀 사립문 밖으로 끌’려 나가 아버지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모습을 지켜본 ‘어머니’는 끝내 쓰러지고 만다. ‘그날 그 자리’에서 목격한 일들은 화자의 무의식 속에서 가라앉아 있다가 흩어진 ‘새털’을 보는 순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여기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언니’와 ‘어머니’는 ‘새’로 치환된다. 이 새들은 여성으로서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체험은 여성으로서의 삶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시인의 내면에 낙인처럼 찍혀 있다. 시인은 그 “눈물나게 짠” 내면의 “상처를 굽고 또 구”(「엉겅퀴 붉게 피던―하동 돌고지山房 추억․2」)워 내며 “엎질러진 채 아직도 세상을 쫓겨 다니고 있다.”(「신세 조진 그 여자」)고 말한다. “그날 담장 밑 사잣밥과 나란히 놓인 할머니의 찢어진 그릇에 얇은 내 生을 담아본 적 있다.”(「버려진 신발을 보면 뒤집어보고 싶다」)거나 “벌레 먹은, 아까워하던 당신 딸을 이렇게 깨끗이/껍질 벗겨 놓았어요,”(「벌레 먹다」)라는 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고통은 자신의 내면을 향하는 칼날이 되기도 하는데 다음 작품이 이러한 경우이다.

 

과일가게 좌판, 봄볕 곁에 누운 지난가을 한자락, 계절을 잃은 눈빛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사과를 고르는 손끝에 묻어나는 가을 한입 베어 먹고 싶어 반으로 잘랐다 속이 푹 썩어 있다 자른 것을 얼른 도로 붙여 쓰레기통 깊숙이 쑤셔넣었다

(그런데가슴이왜이렇게벌렁거리지?심장에못박고간자식?때문에목구멍을무시로치받는병같은눈물?때문에이따끔취하는낮술?때문에도진울렁증?때문에폐차장근처만가면그곳으로몸밀어넣고싶은나?때문에빨리늙어버린엄니?때문에―끄억!흡!썩은내?도망가자!겉만멀쩡한사과?가쫓아온다!업,業,업,業)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사과를 자르듯 나도 한번……

 

이봐요, 칼 좀 다시 줘볼래요?

―「칼 좀 다시 줘볼래요?」 전문

 

이 작품에서 ‘지난 가을 한자락’은 지나온 삶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 애가 간 지 8년이 지났”(「시들지 않는 꽃」)지만 그날 이후 멈춰진 ‘나’의 시간이기도 하고, “강을 건너간 그 애”(「발효를 위하여」)로 인해 내가 휘청거리던 시간이기도 하다. 또한 “다친 새끼 끌어안고 쩔쩔 매는 어미, 짐승일”(「단세포동물이 되다―병상일기․3」) 뿐이었던 시간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지나온 나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음에는 틀림없다는 점이다. 그런 시간을 간직한 사과는 곧 화자로 표상된 시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것이 두려운 ‘나’는 ‘자른 것을 얼른 도로 붙여 쓰레기통 깊숙이 쑤셔넣’는다. 하지만 이내 가슴이 벌렁거리고 버려진 사과의 모습에서 ‘심장에못박고간자식’, ‘폐차장근처만가면그곳으로몸밀어넣고싶은나’, ‘빨리늙어버린엄니’의 모습을 떠올린다. 결국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누는 행위는 그러한 고통을 스스로 감내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주목할 점은 이 고통은 대를 물린 고통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수진이/한점 정물화로 남은 그들은 아직도 슬픈/내 기억의 중심에 있”(「기억의 중심」)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이 나아가 그 원인이 ‘업(業)’에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지면서 개인적 체험이 보편적으로 확대되고 상처의 극복을 가능하게 한다.

5

 

지금까지 김왕노, 전미정, 황희순 세 시인이 부조리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들이 어떻게 이를 극복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음 작품들을 보자.

(……중략……)

 

③ 보문산 등나무 그늘,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방울방울 떨어졌네 쓰름매미가 늦여름을 울고 햇살이 실바람에 찰랑찰랑 굴러다녔네 소주잔에 햇살을 담아 실컷 마셨네

올가을, 나 아무래도 아이를 밸 것 같아

내 몸이 환해지겠네

―황희순의 「가을을 붙들다」 전문

 

(……중략……)

 

부활과 재생, 생명력의 회복이라는 점에서는 황희순 시인도 마찬 가지이다. 황희순 시인의 경우 이러한 점은 “산다는 건 작아지며 기다리는 것/ 뼈가 보일 때까지 도려내며 견디는 것”(「한낮의 섬」)이라는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나를 조종하던 끈도 사라져” “울타리 훌쩍 뛰어넘어 무릎이 깨지도록”(「이제 넘어지고 싶다」)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삶은 단순히 예전 삶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존재와 생명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온갖 구정물에 빠뜨려 주눅 든 두 손 대신 깨끗이 놀아줄 씩씩한 손 하나”(「三手觀音像」)를 통해 내면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세계를 자아 속에 받아들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③에서 보이는 모습도 그러하다. 이 작품에서 ‘나’는 ‘늦여름을 울고 햇살’을 ‘소주잔에 담아 실컷 마신’다. ‘가을’이 결실의 시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늦여름’은 인고의 시간이며 ‘울고 있는 햇살’은 고통스럽고 부조리한 세계에 놓여 있는 자아의 모습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를 ‘마시는’ 것은 그러한 세계를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여 그 상처를 삭히기 위한 의지적 행위이다. 이러한 점은 ‘소주잔’이라는 시어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를 통해 ‘햇살’은 새 생명의 상징인 ‘아이’로 잉태될 수 있으며, ‘내 몸’도 ‘환해지’면서 존재의 생명력을 회복하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세 시인이 부조리를 인식하고 이를 나타내는 방법은 각기 다르다. 하지만 그로 인한 상처에 끝내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는 점과 이를 극복하는 자세가 의지적이라는 점은 모두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언급한 세 시인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크게 보아 그렇다는 것일 뿐, 미시적으로 접근해 들어가면 엄연히 다양성이 존재한다. 비록 지향점이 같다고 하더라도 각 시집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망이 다양하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각각의 시집과 개별 작품에서 이를 찾아가며 읽는 것도 유의미할 것이므로 이는 시집을 읽는 독자들의 몫에 맡기고자 한다.

__<리토피아, 2007, 봄호(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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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깊이, 상처의 너비

 

남기택(강원대 교수)

 

 

(……상략……)

 

3. 새의 귀환

황희순의 『새가 날아간 자리』는 표제로부터 ‘새’의 소멸을 명시한다. 여기서 새의 부재는 기억과 존재의 '자리'를 찾는 또 다른 지표이다. 새 혹은 당위가 사라진 자리에서 시작되는 노래는 결국 아픈 상처의 기억일 것이다. 황희순 시는 삶의 상처가 언어로 화하는 다양한 양태를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것을 포함한 일상 속 상처의 변주들을 접하게 된다. 그 상처의 기원이 궁금하다.

 

바람은 소리가 없다

누군가 만났을 때 비로소 소리가 된다

소나무 만나면 솔바람 되고

풍경을 만나면 풍경 소리가 된다

큰 구멍 만나면 큰 소리 되고

작은 구멍 만나면 작은 소리가 된다

아이가 찢어놓은 내 가슴은

바람이 없어도 소리가 난다

그곳엔 아예 길이 나 있어

아버지도 그 길로 가고 친구도 그 길로 갔다

돌아올 길 없는, 피딱지 엉겨 붙은

내가 그린 그 길엔

바람 없이도 늘 소리가 난다

―「가슴에 난 길」 전문

 

여기에서 그리는 “가슴에 난 길”이란 죽음으로 형성된 길이다. 존재가 사라진 적멸의 길이 바람 없이도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길"은 무의 현시이자 파동이라 하겠다. "아이가 찢어놓은 내 가슴"이라는 표현은 화자의 슬픔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고백한다. 혈육을 잃은 슬픔의 길이요 보이지 않는 절망의 길이기에 혼란의 구멍이기도 하다. 치정에서 비롯된 아픔을 새의 부재로 표현한 「새가 날아간 자리」를 이어 이 작품은 가족사의 비극적 서사를 시화하고 있다. '구멍'은 기억의 육화된 상처로 황희순 시에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삶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자 시를 이끄는 견인차이다.

이 무정형의 길과 같이 황희순 시는 산문체 진술이라는 형식을 종종 빈다. 이는 행화되지 않는, 구조화할 수 없는 삶의 상처를 표시하는 형식일 수 있다. 지극한 슬픔 속에서 정제될 수 없는 감정의 값이 드러나는 구조인 셈이다. 이러한 형식은 황희순 시의 상처받은 자아가 '씹고 씹히며' 이어지는 "아날로그 사랑'의 관성에 익숙해 있다는 사실과도 관계된다.("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서로를 껌 씹듯 씹는 거". 「아날로그 사랑」) 반복되는 상처의 기록과 긴 진술의 형식은 사라진 사랑과 상처를 연속적 물리량으로 재현하는 그의 방식일 것이다.

'봄'이라는 배경 역시 이와 관계된다. 봄은 사라진 새의 빈자리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 사랑에 익숙한, 황희순 시의 어쩔 수 없는 시제일 것이다. 봄과 더불어 새와 상처와 죽음이 귀환한다. 그러나 이것이 낙천적 희망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봄은 오히려 무덤이기도 하다.(봉분 없는 내 무덤 위엔 해마다 삼베조각 같은 목련꽃잎이나 하릴없이 쌓일 것", 「봄은 무덤이다」) 상처와 죽음의 재생은 그 슬픔의 질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에서 현재화된다.

 

긴 겨울밤, 할머니는 호롱불 아래 옹송그리고 앉아 뒤꿈치 굳은살을 일삼아 도려냈다 기척 없는 문밖을 이따금 내다보며 평생 등 돌리고 살다 간 할아버지를 도려냈다 아무리 도려내도 작은 신발에 담긴 할머니 발은 넘치고 또 넘쳤다 겨울이 가고 바닥이 다 닳은 흰 고무신 한 켤레를 남겼다 그날 담장 밑 사잣밥과 나란히 놓인 할머니의 찢어진 그릇에 얇은 내 生을 담아본 적 있다 바닥이 만져지는 삶을 신어본 적 있다

버려진 신발을 보면 뒤집어보고 싶다

 

그 그릇에 담겼던 발이 궁금해진다

―「버려진 신발을 보면 뒤집어보고 싶다」 전문

 

이 작품에서 "버려진 신발"을 향한 욕망은 죽음의 확인이자 재생의 충동이다. 자신의 것을 투사하여("얇은 내 생을 담아본 적 있다") 감각하는 타자의 삶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황희순 시는 상처들이 난무한 만큼 존재의 힘겨운 방식을 증거하고 있다. 새를 떠나보낸 중심의 기억은 완고하기만 하다.("그들은 아직도 슬픈/내 기억의 중심", 「기억의 중심」) 그와 동시에 가족사의 상처를 딛고 소외된 자들의 슬픔으로 향함을(「박쥐란」, 「꼬깃꼬깃한 하루」, 「만다라」 등), 절망의 구멍이 다시 포용과 생명의 근원으로 변함을(「그곳은 구렁」, 「회귀를 위한 변명」, 「밥」 등) 본다. 숱한 새소리의 상처가 새로운 존재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순간일 것이다.

(……하략……)

 

--<시와 상상, 2007, 봄(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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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고통을 넘어서는 여성주의

-황희순, 『새가 날아간 자리』

 

강 경 희(숭실대 강사)

 

 

 

1. 고통과 한몸 되기

 

인간은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기억은 과거의 시간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현재로 이어지면서 우리의 자의식을 뒤흔든다. 인간의 의식은 고립되고 단절적인 속성을 지닌 것이 아니다. 때문에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면 그것은 새로운 사건과 상황들로 연계되면서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갱신된다. 기억이란 지속적 변용 과정을 통해 개인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 특히 트라우마(trauma)는 한 개인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기억이라 할 수 있다. 정신적 위상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의 끊임없이 작용한다. 프로이드는 심리분석을 통해 인간에게 가해지는 기억, 특히 상처는 억압된 무의식적 욕망을 반영한다고 했다. 특 한 개인의 트라우마는 자아의 억압된 세계의 욕망과 그것을 벗어나려는 충동들을 무의식적으로 표출하게 만든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예술가의 트라우마는 작품에 담긴 의식적 근본적 문제가 무엇인지 밝혀주는 열쇠라 할 수 있다.

황희순의 『새가 날아간 자리』는 상처와 고통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그의 상처의 뿌리는 가족이다. “긴 겨울밤, 할머니는 호롱불 아래 옹송그리고 앉아 뒤꿈치 굳은살을 일삼아 도려냈다 기척 없는 문밖을 이따금 내다보며 평생 들 돌리고 살다 간 할아버지를 도려냈다”(「버려진 신발을 보면 뒤집어보고 싶다」)라는 문장 속에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 못했던 할머니의 아픈 삶의 일면이 스며있다. 평생 등 돌리고 살다간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생애를 고통스럽게 만든 존재였을 것이다. 할머니의 굳은살은 아무리 도려내어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이다. 치유될 수 없기에 그것은 가혹한 운명이다. 운명은 선택이 아닌 숙명이다. 그것은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아를 괴롭히는 본질적 문제이다.

황희순의 기억의 중심에는 언제나 가족이 있다. “이승에서 다시 볼 수 없는 피붙이/할아머지 할머니 아버지 수진이/한 점 정물화로 남은 그들은 아직도 슬픈/내 기억의 중심에 있다”(「기억의 중심」)이라는 말처럼 그에게 가족은 가장 슬픈 기억으로 존재한다. 이미 이승을 떠나간 가족들임에도 불구하고 황희순은 떠나간 자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에게 과거의 슬픈 기억은 고통이다. 그는 자신을 고통을 “처음엔/뽑아버리고 싶은 이물질”로 인식했지만, “언제부턴가 들여다보며” 사는 법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그가 선택한 것은 고통과 한 몸이 되는 것이었다.

 

어릴 적 나는 가끔 가위 눌려 경기를 했네 배가 풍선처럼 부풀고 팔다리가 늘어났네 둥둥 떠오르기도 하고 구들장이 꺼지기도 했네 그 귀신 들러붙은 날 할머니는 내 목을 자를 듯 시퍼런 식칼을 휘두르며 칼 담근 바가지 물을 얼굴에 품어댔네 욕을 하듯 중얼거리며 칼로 문살을 드르륵드르륵 긁었네 그 소리는 천둥 같았네 그런 밤 툇마루엔 허연 두루마기 달빛이 걸터앉아 있었네

40여 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귀신, 그 귀신 들러붙은 밤 파충류처럼 버르적거리네 희미한 등불 아래 나를 내려다보던 아버지도 무섭던 달빛도 할머니도 지금은 없네

-「봄밤」 전문

 

「봄밤」은 황희순의 정신적 외상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위 눌려 경기”를 했던 기억, “배가 풍선처럼 부풀고 팔다리가 늘어”지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은 그에게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허약한 어린 나의 아픔은 병원에서 치유된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민간 신앙으로 다스려진다. 할머니는 어린 나의 병을 ‘귀신들림’으로 파악하고 주술적 방법으로 나의 병을 치유한다.

어린 나에게 할머니의 주술적 행위는 공포로 인지된다. “내 목을 자를 듯 시퍼런 식칼을 휘두르며 칼 담근 바가지 물을 얼굴에 품어댔네 욕을 하듯 중얼거리며 칼로 문살을 드르륵드르륵 긁었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어린 나는 위험과 전율의 순간을 경험한다. 어린 나에게 병은 곧 죽음과의 싸움이었다. 그 싸움에서 그가 또렷이 기억하는 감각은 세 가지이다. 즉 ‘시퍼런 칼날’, ‘얼굴에 쏟아지는 물’, ‘문살을 긁는 소리’이다. ‘빛’ ‘감촉’ ‘소리’, 이 세 가지의 원초적 감각은 그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각인된다. 다시 말해 어린 나는 온몸의 감각으로 죽음을 이겨내야만 했던 공포에 직면했던 것이다. 어린 나를 공포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병으로 인한 고통뿐 아니라, 그 고통을 다스렸던 할머니의 주술적 행위이기도 하다. 어린 나는 두 가지 모두에게 저항할 수 없었던 나약한 존재이다. 자신의 힘으로 고통을 이겨낼 수 없었기에 할머니의 주술적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처럼 항거할 수 없었던 강제화된 고통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때문에 그는 이 고통을 “40여 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귀신”이라 말한다. 육체의 병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그의 영혼을 장악한 귀신은 그를 끈질기게 괴롭혔던 것이다. 황희순의 트라우마는 이처럼 공포와 두려움의 기억이다. “나를 내려다보던 아버지도 무섭던 달빛도 할머니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은 존재를 망각시키지 못한 채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보이지 않는 헛것과의 싸움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기에 그것은 언제나 슬픈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열아홉 살 여름이었다 은선네 집에 화장품 장수가 왔다 화장품 살 돈이 없었다 뿔을 감추고 곳간에 숨어들어 쌀을 몇 되 펐다 쌀자루를 끌어안고 개구멍을 빠져나가다 새참 가지러 온 할머니에게 들켰다 깜짝 놀란 할머니는 못 본 척했다 나도 못 본 척 쌀을 질질 흘리며 개구멍을 개처럼 빠져나갔다 그 구멍 빠져나갔더니 또 다른 구멍이 있었다

그곳에 영영 갇히고 말았다

-「내 구멍에 갇히다」

 

열아홉 소녀는 화장품을 사고 싶었다. 자신을 예쁘게 꾸미고 싶은 본능이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가난한 현실로 인해 좌절된다. 경제적 궁핍은 소녀의 소박한 바람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소원을 이루기 위해 내가 결정한 일은 쌀자루를 훔치는 일이었다. 자신이 필요한 것을 위해 “쌀자루를 끌어안고 개구멍을 빠져나가”는 행위에서 그는 본질적인 죄의식을 느낀다. “개구멍을 개처럼” 빠져나가는 나의 행위는 결국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죄의식을 갖게 만든다. “구멍 빠져나갔더니 또 다른 구멍이 있었다/그곳에 영영 갇히고 말았다”라는 것은 비록 할머니로부터는 면죄부를 받았을지 모르지만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으로부터 떨쳐날 수 없었음을 말해준다.

황희순의 고통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시작된다. 현실은 자신을 구속시키고 고통스럽게 한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실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그러니 이러한 탈출은 현실에 의해 통제되고, 결국 원초적 죄의식으로 그를 괴롭힌다. 이러한 강박적 의식은 급기야 세계에 대한 비관적 시선으로 확장된다. 예를 들어 황희순의 시에 나타난 미적 대상은 순수한 미적 대상으로 인식되기보다는 부정화된 시선을 통해 변용된다. 이는 그의 시의 제목에서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꽃에 찔리며 살아요」, 「봄이면 나는 개가 된다」, 「벌레 먹다」, 「봄은 무덤이다」, 「열려 있는 문은 불안하다」와 같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꽃’, ‘봄’, ‘열매’, ‘열려 있는 문’과 같이 따뜻하고 개방적인 사태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여준다. 꽃은 찔림으로, 봄은 개와 무덤으로, 열매에서 썩음을 생각하는 그의 시적 발상은 세계를 아름답게만 볼 수 없는 시인의 주관적 태도를 반영한다. 이러한 그의 비관적 세계 인식은 근본적으로 그의 치욕적인 체험과 관련된다. 그러나 황희순은 세계를 부정화함으로써 현실을 개탄하기보다는, 고통을 적극적으로 내재화함으로써 현실과 대결한다. 그 대결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랑’이다.

그가 말했다

 

사랑은 끝없이 샘솟는

옹달샘 같은 거라고

그러니 우리 사랑은 절대

마르지 않을 거라고

그는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근차근 씹기 시작했다

단 하루, 나를 씹지 않은 그가

이빨이 들떠 아프단다

씹히지 않은 내 몸도 근질거린다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

서로를 껌 씹듯 씹는 거다

질겅질겅 씹히는 거다

― 「아날로그 사랑」

 

황희순이 말하는 사랑은 고통의 방식이다. 절대 마르지 않는 사랑은 서로를 보듬고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는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차근차근 씹기 시작했다”라는 표현처럼 사랑하는 대상은 나의 전부를 남김없이 유린한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상태의 가학적 행위를 오히려 옹호한다. “씹히지 않은 내 몸도 근질거린다”라는 말처럼 씹히지 않을 때 내 몸은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즉 그에게 사랑은 서로를 향한 무서운 집착이다. 그의 집착은 “서로를 껍 씹듯 씹는 거다”. 황희순의 사랑은 아름다운 수사로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은 아무 때나 버릴 수 있는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껌’에 비유된다. 그것은 참혹하면서도 서글프다. “질겅질겅 씹히는” 껌은 단물이 빠지면 언제나 버려질 운명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비극적 운명을 사랑이라 말한다.

그가 말하는 ‘아날로그 사랑’이란 이처럼 존재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자신의 모든 것을 소모시키는, 그러나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하는 참담한 자기 헌신이다. 그는 이러한 헌신적 사랑을 숭고미로 승화시키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현실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실을 미화함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넘어서려는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철저히 이상주의를 지양한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벗어나기 위해 꿈으로 자신을 위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상처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사각의 링에 갇혀 구석으로 몰린 나를 구출할 방법은 무엇일까? 사각의 링은 현실이고 링 밖을 벗어나면 절벽이다. 황희순의 탈출은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피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기억,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비참한 현실, 더 이상 갈 곳 없는 불투명한 미래, 그러나 그는 도망치지 않는다. 갇힌 링에서 “카운트 없는 이 비공개 스파링”(「詩作」)이 무섭지만 그가 감당해야 할 현실이기 때문이다. 두렵지만 가야 하는, 끝내는 죽음의 공포와 직면하는 것이 인생일 때 그는 그 험난한 고통과 한몸 되는 길을 기꺼이 선택한 것이다.

__강경희 평론집 『표류와 유출의 상상력』(2007, 푸른사랑사 刊)에서

 

 

 

  

 

*********************************************************************************디스크 재발하다황희순

   도둑고양이가 나를 보더니 놀라 도망간다. 같이 놀랐던 나는 어둔 골목을 개처럼 어슬렁거리다 파지 줍는 젊은 여인을 만났다. 눈치를 보다 말을 걸었다. 애 아빠가 고-공장에더 짤렸더요. 혀 짧은 어리바리한 그녀를 집으로 데려왔다. 책꽂이에 꽂힌 시집을 닥치는 대로 뽑아 손수레 가득 채워줬다. 이-이거 터-턴원은 바더요 턴원, 고-마워요 고마워요. 저 무거운 책이 천원이라니! 시인은 얼마나 가벼운 싸구려인가. 나는 천원에 걸려 넘어졌다. 그 밤 허리디스크가 재발했다. 너를 무시한 죄, 비웃은 죄, 말 많이 한 죄, 술주정한 죄, 밥만 축낸 죄, 詩 쓴 죄, 안다. 나는 과분하게 너무 큰 집에서 살았다. 큰 내 몸이 드디어 두 동강 났다.

--<애지> 2005. 봄

 

 이해하기 쉬운 시이다. 산문처럼 편안하게 상황을 설명하기 때문이다.(그러한 측면에서 조금 더 압축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그러나 시인의 행동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시는 쉽지 않은 시가 된다.
   어두운 골목에서 도둑고양이를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들을 볼 때마다 섬뜩한 느낌을 받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배고픈 고통을 발견하게도 된다. 시인도 고양이를 보았고 놀랐다. 그리고 배고픈 고통을 생각하게 되었다. 차이가 있다면 배고픈 고양이의 뒤편으로 불쌍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허름한 여인. 그 여인은 파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남편의 실직이, 죄없는 여인을 가난한 골목으로 밀어넣었다.
   시인은 생각한다. 이 여인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야 한다고. 하지만 무언가를 해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 그러한 여인에게 말을 걸고 고통을 들어주고 도울 것을 결심하는 것이 쉽지 않다.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냉정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 같다. 도와주면 자립심을 잃을 것이라는 막연한 자기 변명으로, 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내 한몸 건사하기도 어렵다는 논리로 우리는 그들을 외면한다. 그런데 시인은 그녀를 외면할 수 없었다. 이 점이 어려운 점이다.
   그 다음 어려운 점은 그녀에게 시인이 해준 일이다. 시인은 돈을 주거나 음식을 주지 않고, 시집을 준다. 아무리 여인이 불쌍하다고 해도, 어떻게 시집을 줄 수 있을까. 시인이 시집을 주었을 때, 여인은 천원이나 나간다고 감격한다. 시인은 감격도 절망도 아닌 어정쩡한 포즈로 시인이 된 것에 죄책감을 갖는다.
   시인이 되어서 남을 깔보고 가난한 자를 비웃고 되지도 않는 말을 하고 세상을 괜히 비관하며 술주정한 것을 후회한다. 그래 보았자 결국에는 밥을 축내고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하지 않는 것이거늘. 시인은 그 죄를 시를 쓴 죄라고 한다. 그래도 시인은 시를 쓸 것이다. 적어도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장식적인 포즈로서의 반성이 아니라, 삶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과의 대면을 통해 과거에 대한 절실한 반성이 가능하다.
   더불어 시인은 자신이 과분하게 큰 집에서 살았음을 새삼 인식한다. 그 집은 두 가지 의미일 것이다. 하나는 가난한 골목을 여유 있게 통과해서 도달할 수 있는 육신의 집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 삶의 고통을 외면하고 멋들이지게 읊은 정신의 집, 즉 말의 집일 것이다. 그 집들이 부끄러워진다는 것은, 과분하게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놓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시집을 내놓고, 부끄러운 생각을 내놓듯, 그렇게 시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큰 내 몸이 드디어 반 토막 났다"이다. 공연한 멋과 내실 없는 철학이 사라지고, 삶의 감각에서 느낄 수 있는 절실함만 남았다는 뜻으로, 나는 해석한다. 시인이 사용했던 말의 척추가 다시 조립되느라고, 다소 고통스러운 디스크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큰 고통을 겪고 말의 진정한 조각가로 다시 탄생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김남석의 계간평 <詩魔의 후예들>/애지, 2005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