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詩 비평

인간되기 프로젝트__ 황희순의 신작시/황정산

섬지기__황희순 2022. 12. 4. 20:53

인간되기 프로젝트__ 황희순의 신작시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우리는 터무니없는 행동을 하거나 잘못된 언행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이 인간아!”라고 하며 혀를 끌끌 찬다. 인간 같지 않은 사람을 인간이라 부르는 이 반어적인 표현을 통해 그 사람의 우매함이나 악행을 힐난하고 제대로 된 사람이 되기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대로 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과연 인간으로서 고유한 가치와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인간이 되고 있지 못하는 것일까. 황희순의 시는 바로 이런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진다. 시인은 먼저 자신이 과연 사람일까를 의심한다.

  쥐로 살거나 개미로 살거나 뭐가 다르겠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의심하며

  사람 아니면 어쩌나 가슴을 쓸어내린 적 있지
  (그림자놀이부분)

  쥐나 개미나 인간이나 한 생명을 가진 존재로 살다 간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자신을 의심하며 사람 아니면 어쩌나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과연 가지고 있는가를 염려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쥐나 개미는 쥐나 개미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 쥐나 개미가 된다. 아무리 인간의 모습으로 살고 있어도 삶의 내용이 그것을 채우지 못하면 스스로 인간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시인은 생각한다. 시인은 더 나아가 자신이 혹시 뱀이 아니었을까를 의심한다.

  내 눈을 봐, 뭐가 보이니
  혹시 벽돌에 눌린 뱀?

  그랬지, 한때
  사람 아닌 적 있었지

  내가 나를 꾸욱 밟아
  죽인 적 있지
  (위 시 부분)

  시인은 이렇게 뱀이 된 자신을 부정하고 죽이기까지 한다. 시인은 왜 자신을 사람이 아닌 뱀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뱀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 시에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다. 아마도 그것은 사악한 욕망, 부끄러운 미천함 이런 부정적인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시인은 자신 안에 내재한 이런 것들을 떨쳐버리고 싶지만, 그것들은 그림자처럼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쥐나 개미나 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자문한다.

  그래서 말인데, 솔직히 말해봐
  나는 어디에 쓰는 도구니

  나는 왜 나를 지울 수 없는 거니
  (위 시 부분
)

  이렇게 본인이 인간인가를 반성하는 시인의 눈에 타인들 역시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티브이 화면 가득 촛불이 일렁여요 그가 화면에 비친 아들 손을 잡으려 팔을 길게 뻗어요 촛불 든 허수가 아비를 불러요 아버지이~
  ...(중략)... 한 무리는 뛰어가며 정답이라고 우겨요 어깨 겯고 나란히 걷던 시절이 있긴 있었던가요
가상도 현실도 아닌 곳에서 쪼글쪼글 홀로 시들어가는 베이비부머 J, 당당하던 걸음걸음은 누가 비틀어놓았을까요 한때 사람속(屬)이었던 그의 꼿꼿한 뼈는 누가 다 뽑아갔을까요
  (「허수아비 근황」 부분)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실천적 노력인 촛불 집회가 숫자놀음의 정치 싸움이 될 때 그것은 허수가 되고 우리는 모두 촛불 든 허수아비가 된다. 사람들의 주장에는 진실과 진정성은 사라지고 서로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이념대립과 상대를 부정하는 혐오만 남아있게 된다. 그래도 이런 허수아비로서라도 쓰일 순간에는 한때 사람속이었지만 그를 세우고 있던 이 이념의 기둥마저 빠져 이제는 쪼글쪼글 홀로 시들어가는존재로 변하고 있다. 세익스피어는 일찍이 인간은 걸어다니는 허수아비라고 한 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어떤 것에 끌려 움직이는 마리오네트 인형이며, 부여된 역할만 맡으며 정해진 시간 동안만을 견디는 허수아비인지 모른다. 인간이라는 말은 단지 꿈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이고 빈말일지 모른다.
그래도 시인은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기를 꿈꾼다.

  천천히 숨을 쉬면 시간이 정말 천천히 갈까요 감춰놓은 시간은 왜 광속으로 사라지는 걸까요 신은 우리 몸에 천사 얼굴을 한 악마를 한 마리씩 심어놓고 구경한대요 ...(중략)...

  그렇다고 절망만 있겠어요 사라진 시간만큼 발걸음 가벼워질 테니까요 쓸모없는 말은 천적의 먹잇감이라 늙은 기러기는 자갈을 입에 물고 날아간대요 ...(중략)

  이렇듯 오래 꿈꿨어요 우린 별의 화석, 꿈에서 깨어나면 태초의 목록 α가 되겠지요 ...(중략)... 길 위에 길이 없어요 나는 어딜 걸어 여기까지 온 걸까요
  (「꿈꿈」 부분
)

  시의 제목인 꿈꿈꿈꾸다의 명사형 즉 꿈꾸기의 시적 표현이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다. 시인은 인간으로 오래 살아가기 위해 힌두교인의 믿음처럼 천천히 숨을 쉬어 감춰진 시간을 아껴보고자 하고, 천적의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문 늙은 기러기처럼 침묵으로 내게 부여된 시간을 지켜 시간 속에 숨어 있는 악마의 출현을 막아보고자 꿈꾼다. 인간이란 이러한 꿈을 꾸는 존재, 꿈꿈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태초의 별의 화석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꿈은 꿈으로만, 길은 길로만 남아 있어 꿈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이 시의 제목 꿈꿈은 꿈꾸기의 명사형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의 삶이 그냥 꿈의 중첩일 뿐이라는 생각의 표현이기도 하다.
  꿈이 현실적 맥락을 상실할 때 그것은 환상이 된다.

  오십육 년 만에 만난 그가 환상에 신음한다고 했다. 간절히 기다렸다며 그리웠다고도 했다. 생뚱맞은 그의 말에 별은 얼결에 별똥 허물을 주워 뒤집어썼다. 오십육 년 전 그곳에서 이곳으로 건너오지 못한 팔순 노인은 자신을 모르듯 별과 별똥을 구별 못 했다. 별은, 속내 보여주면 좀비가 될 터이니 환상을 말하지도 꿈꾸지도 말라고 했다. 오십육 년 후 만나러 오겠다고 하려다 말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붙박이 된 그는 가슴을 빼꼼 열어 앙상한 뼈를 기어이 보여주었다. 순간 별은 허물을 벗어놓고 훌훌 날아올랐다. 날다 내려다보니 별똥 허물을 뒤집어쓴 좀비가 막다른 길 끝에 흐물흐물 서 있었다.
  (별별 환상에 부쳐부분)

  오십육 년 만에 만난 그는 아주 어렸을 때 헤어진 사람인 모양이다. 팔순 노인이 된 그는 이제 별과 별똥을 구별하지 못할 만큼 의식과 판단이 흐려져 있다. 별과 별똥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물의 의미와 그것의 질서와 가치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런 상태에서 말을 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면 그것은 자신이 살아 있으면서도 사람으로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좀비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기어이 자신의 속내를 보이고 마는데, 그래 봐야 그것은 환상일 뿐이다.

  길냥이가 다가가 냄새를 맡더니 불에 덴 듯 도망쳤다. 길냥이가 본 건 무엇이었을까. 아흐, 장난이었는데. 소슬바람이 참견 말고 제자리로 돌아가라며 화악 떠밀었다. 지고 지고 또 지는 달, 예순다섯예순여섯예순일곱……, 별은 다시 계수나무에 걸터앉아 지난여름 헤아리던 수를 손꼽기 시작했다.
  ( 위 시 부분)

  시인은 이 경험을 통해 우리의 삶이 모두 이 좀비가 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소슬바람이 참견 말고 제자리로 돌아가라며길냥이를 떠민 것은 이러한 일이 특별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사람이 별의 수를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별이 계수나무에 걸터앉아수를 헤아리는 것은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는 현실의 비밀을 별은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이런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를 나로 만들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유와 방향이 사실은 뻔뻔한 욕망과 그것의 실현을 꿈꾸는 헛된 환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지혜와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끝내 욕망을 벗지 못한 채 육신을 지탱하면서 살 뿐이다. 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좀비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세상에 진실한 마음은 있는 것일까? 다음 시가 이것에 대해 잘 대답해 주고 있다.

테미네거리‘인간서비스센터’에서는
고장난인간을고쳐준다는데
아무도모르게구제한다는데
어떤소원이든들어준다는데
의사가모르는병도물로불끄듯한다는데
의심하면효험이없다는데
진심만있으면된다는데
세상답을다알고있다는데
……
(「진실한 마음 삽니다」 부분)

  시인은 길거리를 가다가 인간서비스센터라는 간판을 보고 저곳이 진짜 인간 서비스센터일까 생각한다. 그런데 그곳의 처방은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의사가 모르는 병도 집안의 여러 고민들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세상의 일이란 진실한 마음이 있으면 다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진실한 마음을 잊어버리거나 속된 욕망으로 이 진실한 마음을 감추며 살고 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우리의 모든 고민은 생겨난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고 해결해 준다는 그곳의 터무니없는 광고문구는 우리 삶의 진실을 아이러니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인은 생각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욕망 때문에 모든 괴로움을 겪거나 남에게 괴로움을 주는 괴물이 된다. 인간이기 때문에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욕망이 또 우리를 인간이 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듯 해결되지 못하는 모순 속에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쥐나 뱀이 되거나 아니면 늙고 병들어 좀비가 되어 살아서도 산 게 아닌 상태의 존재가 될 뿐이다. 이러한 운명에서 벗어나는 것은 가능할까?

우리의애틋한시간은다시올것같지않아
신통방통한곳이가까이있는데
이땅은왜첩첩지뢰밭인거니
도통하면일년을백년을
전광석화로살수있을텐데
밤은왜이토록긴거니
진실한맘은어떻게생긴거니
얼마면되니/그런데말이야
그곳은쥐새끼만들랑거리는지
셔터가바닥에닿을듯말듯늘걸쳐있어
쥐로고쳐서내쫓거나구워먹는건아니겠지?
(위 시 부분)

  “신통방통한방법으로 도통하면인간의 욕망도 또 그 욕망에 의한 번민도 다 벗어나 일년을백년을/전광석화로시공을 초월하는 존재로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곳은 없다. 있어도 겨우 쥐새끼만 들락거릴 공간만 남겨두고 셔터가 내려져 있어 그곳에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인간은 모두 진심을 갖지 못한 의심하는쥐새끼일 뿐이다. 위 시의 형태적 특징이 이러한 시적 의미를 강조해주는 효과를 보여준다. 띄어쓰기 안 되어 있는 빽빽한 시행은 셔터의 완고한 가로무늬를 연상하게 하고, 또한 이 시행이 가운데 정렬로 편집되어 우리 삶의 진실을 답답하게 가로막고 가리고 있는 커튼이나 블라인드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런데 이 시는 시에 대한 비유로도 읽힌다. 사람들은 시가 아름다운 말로 인간을 위로해 주고 현실을 넘어선 아름다운 낭만적 꿈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한 시를 통해 감동을 얻고 그런 시를 좋은 시라 생각한다. 그런 시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현실의 삶과 인간의 욕망의 추악함을 애써 감추는 거짓을 믿는 것이 된다. 반대로 그러한 세계가 있을까 의심하는 것은 끝없이 자신은 쥐나 뱀과 같은 미물로 존재하게 만들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모두 애초에 인간되기 틀린 것이다.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황희순 시인은 인간이 무엇이고 그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그가 쓴 시들은 바로 인간되기 프로젝트이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시인은 시를 얻었다. 그가 인간인지 뱀인지 쥐인지 좀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황정산 : 1993년 『창작과비평』 평론, 2002년 『정신과표현』 시 발표 / 저서 『주변에서 글쓰기』, 『쉽게 쓴 문학의 이해』 등.

___작가마당 41.(2022. 하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