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읽기·책읽기

북극형 인간 외 1편/정숙자

섬지기__황희순 2022. 7. 29. 13:35

  북극형 인간

  정숙자


  육체가 죽었을 때 가장 아까운 건 눈동자다
  그 영롱함
  그 무구함
  그 다정함
  이, 무참히 썩거나 재가 되어버린다

  다음으로 아까운 건 뇌 아닐까
  그 직관력
  그 기억력
  그 분별력
  이, 가차 없이 꺾이고 묻히고 만다

  (관절들은 또 얼마나 섬세하고 상냥했던가)

  티끌만 한 잘못도 없을지라도 육신 한 덩어리 숨지는 찰나, 정지될 수밖에 없는 소기관들. 그런 게 곧 죽음인 거지.

  비
  첫눈
  별 의 별 자 리
  헤쳐모이는 바람까지도

  이런 우리네 무덤 안팎을 위로하려고 철 따라 매스게임 벌이는지도 몰라. 사계절 너머 넘어 펼쳐지는 색깔과 율동 음향까지도

  북극에 길든 순록들 모두 햇볕이 위협이 될 수도 있지
  우리가 몸담은 어디라 한들 북극 아닌 곳 없을 테지만

  그래도 우리 정녕

  햇빛을, 봄을 기다리지. 죽을 때 죽더라도
  단 한 번 가슴속 얼음을 녹이고 싶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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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름 곁


정숙자


어떻게 해야 늘 그들이 될 수 있을까

바람 지나갈 때 침묵을 섞어 보낼 수 있을까

마음 걸림
들키지 않고
조용히 몇 잎 흔들며
서 있을 수 있을까

바위 해살 개미 멧새들... 사이
천천히, 느긋이 타오를 수 있을까

베이더라도 고요히 수평으로 쓰러질 수 있을까

구름 속으로
손 뻗으며
느리게, 느리게 바다로--깊이로만 울 수 있을까

***정숙자 시집 공검 & 굴원』에서
***정숙자 시인 : 1952년 전북 김제 출생/1998년 <문학정신> 등단/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