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쓰기

임강빈 시비 건립기

섬지기__황희순 2020. 8. 30. 09:30

임강빈 시비(최종태 설계)__대전 보문산 사정근린공원 내 (2020. 7. 16. 건립)

 

임강빈 시비 건립기

 

황희순(시인)

 

프롤로그

오래전 일이다. 나는 정말 첩첩산중에서 마음에 상처를 입고 헤매는 중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잠잘 곳을 찾다 보니 선생님 댁 대문 앞에 내가 서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사하시어 남의 집이 되어버린 ‘대전 서구 도마동 126-2’, 옆집 담 너머 지붕까지 덮은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조금 망설이다 초인종을 눌렀다. 놀라신 선생님과 사모님은 서재에 이불을 깔아주셨고, 한 세 시간쯤 자고 일어나 살그머니 나왔다. 나오는 길에 흐트러져 있는 현관 신발들을 정리하고 현관문이 열리지 않도록 벽돌로 눌러놓았다. 새벽 5시에 궁금하여 나오신 선생님은, 텅 빈 방과 가지런한 현관 신발들을 보고 여명이 밝아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 시간은 속으로 울었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2년쯤 후에 들었다. 선생님이 바라보시던 그날 그 하늘에, 나를 따라오던 빛바랜 달이 떠있지 않았을까.
___황희순, 「첩첩산중에서 만난 길」 부분(시와인식, 2007. 겨울)

임강빈 선생을 처음 만난 건 1993, 대전에서 <오늘의문학사> 일을 도맡아 하고 있을 때였다. 그 무렵 선생의 여섯 번째 시집 <버리는 날의 반복><오늘의문학사>에서 펴냈다. 그 후 199511월에 정년퇴임 기념으로 시선집 <초록빛에 기대어>를 발간, 책과 함께 부칠 정년퇴임 인사를 겸한 편지를 타이핑해달라고 오셨다. 타이핑하다가 글이 슬퍼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선생은 무슨 일이냐며 놀라셨고, 그때부터 선생과 임의로워졌던 거 같다그리고 1997, 상상으로도 불가능한 우환을 당해 일도 시도 다 접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밥을 사주며 나를 붙잡아 시를 다시 쓰도록 용기를 주셨다하여 1999현대시학에 응모, 그해 10월 정진규 주간이 임강빈 선생을 심사위원으로 점찍어 황희순 시 심사평을 쓰게 하여 재등단했다. 심사평을 쓰며 선생은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시를 버팀목 삼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시 살기 시작했으니, 지금의 나는 선생 덕분에 재조립된 시인이다. 시쓰기를 그때 그만뒀더라면 나는 무엇이 되었을까.
가끔 점심때 삼겹살과 소주를 한 병 나눠 마시며 나는 선생의 시를 프린트하여 가져다드리고, 시를 모아 시집 만드는 걸 도와드렸다. 어찌 좋은 날만 있었겠는가. 산문시만 쓴다고 꾸지람도 들어가며, 술 많이 마신다고 혼나기도 하고 삐치기도 하며 그렇게 20여 년이 지나갔다. 선생은 나의 심사(心師)이셨으니, 제맛을 모르면서 익어가는 사과처럼 고요히 노력하라 하셨고, 지면이 없다고 구걸하지 말며, 청탁이 오면 꾀부리지 말고 가장 잘 빚어진 시부터 발표하라 하셨다.
20여 년의 이야기를 어찌 다 할 수 있겠는가. 무슨 인연인지 부모님 임종도 못 지킨 내가 2016716, 선생의 임종을 지켰다. 그리고 2018년이 저물어 갈 무렵 선생의 시전집을 묶으면서,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유고시집을 그만 내 손으로 묶고 말았다. 별세 일주일 전 병석에서 내게 하신 말씀 따라, 마지막 시집 발간 후 쓰셨다는 미발표 유고시 10편을 발굴하여 육필도 함께 묶었다. 20여 년 전부터 컴퓨터에 저장한 100여 편의 미발표 시를 지울 수가 없었다. 하여 그 변명을 책 끝에 나는 이렇게 썼다.

이승의 일은 산 사람들 몫이니 나무라셔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버리라고 하신 말씀 어긴 이 후학을 부디 용서해 주시기를…….
___황희순, 임강빈 유고시집 <나는 왜 눈물이 없을까>(2019) 발문 부분

2000년 초 몇 년 동안 가을이면 박용래 시비에 가자 하셨다. 막걸리 한 병을 사 들고 888번 버스를 타고 보문산 사정공원엘 가서, 시비 앞에 막걸리 한 잔 따라놓고 선생과 나는 소풍하듯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느 날 박용래 시비를 세우게 된 동기를 얘기해 주셨다.

문협 주최로 보문산 음악당에서 백일장 행사가 있었다. 대전의 터주 노릇을 하는 그를 심사위원에서 뺄 수는 없었다. 오후가 되자 점심때부터 마신 술이 벌써 취해 있었다. 그는 열외로 밀렸다. 행사를 마치고 내려가는 일행 중에 제일 늦게 두 사람이 뒤로 쳐졌다. 비틀거리는 그를 붙잡고 한마디 쏘아붙였다.
“이젠 아주 시를 버릴 작정 했어?”
“……?”
“죽으면 그만이야. 쓰고 싶어도 못 하잖아.”
“얼래, 참 이상한 말 하네.”
“시비(詩碑) 어디가 좋을까. 이 보문산 어때?”
“필요 없어. 저 아래 가서 술 한잔 사라 임마.”
우린 이렇게 씨부렁거리며 억지로 내려왔다.
__임강빈, 「朴龍來, 그리고 우정」 부분(2000. ≪시문학≫)

선생은 1984년 박용래 시비 건립추진위원장으로, ‘시비 이야기를 먼저 꺼냈으니 나는 약속을 지켰다.’고 하셨다. 그때 내가 장난스레 임강빈 시비는 박용래 시비 옆에 제가 세울게요.” 했다. 선생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는 듯 어이구~’ 하며 웃으셨다. 나도 따라 허리 꼬부라지게 웃었다. 선생 돌아가시고 유품과 서재 정리를 마치고, 2017310일부터 시비 건립을 찬찬히 생각했다.

돌아가시기 두 달 전쯤, 선생 댁에서 마지막 시집이 된 <바람, 만지작거리다> 교정을 봐 드리던 201659일이었다. 교정을 마치고 선생을 부축하여 가끔 다니던 아파트 앞 동태찌개 식당엘 갔다. 잔을 마주치며 오랜만에 즐겁게 소주를 한두 잔 마시던 그날, “야아~, 이제 살 거 같다. 앞으로 천 일은 더 살겄지?” 하시던 그 저녁, 당신의 시 마을나중에 시비 세우게 되면 이거 어떨까.” 하며 보여주셨다. 건강하실 때는 비관적이셨기에 나는 또 장난스럽게 선생님 시비 세우시게요?” 했더니, “나중에 만약 세우게 된다면 말여.” 하셨다. 그리고 이 시집에 넣지 왜 안 넣으셨어요.” 했더니, “시집에 넣을 시는 아니고.” 하셨다.

첫 계단
천 일은 더 사신다더니, 그날 그 말씀이 유언이 될 줄이야. 선생의 서재와 유품을 정리하면서 선생의 장남 임창우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시전집 비용과 시비 제작비는 준비되었으니 시전집도 만들고 시비는 꼭 대전에 세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족의 말에 용기를 내었다. 선생께 장난으로 했던 오래전 내 말을 떠올리며 언감생심 그 일을 추진하려고 맘을 먹었다. 두렵긴 해도 자금이 있으니 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최종태 선생 조각품이 필요했다. 박용래 시비처럼 꼭 그분의 작품으로 하고 싶었다. 2017317, 중구문화원 토우 수업 중 장순옥 강사를 통해 최종태 선생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그리고 바로 용기를 내어 첫인사를 드리고, 임강빈 시비를 세우게 되면 박용래 시비처럼 해주실 수 있는지 여쭤봤다. 망설임 없이 허락하셨다. 1차 관문은 통과, 시비 건립 신청서 양식을 내 맘대로 만들어 작성하기 시작했다.
보문산 사정공원에 시비를 세우려면 대전시청 인가를 받아야 하니 시청을 드나들어야 할 터, 혼자는 힘들 것 같아 시청 문화예술정책과에 근무 경력이 있는 박헌오 시조시인에게 2017327, 도움 요청을 했다. 대전문협 부회장이라서 더욱 필요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는 일이 어디 흔하던가. 그해 523, 본격 추진을 위해 만난 모 문학 단체장이 시비 이야기를 하려고 했더니 유명하지도 않은, 무슨 시비를 세운다고.” 하면서 불쾌해했다. 임창우도 함께 있는 자리에서였다. 하여 시비 세울 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언젠가 재개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므로 시비 세우는 일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최종태 선생께는 말씀드리지 않았다.
이듬해인 2018년엔 나의 다섯 번째 시집 수혈놀이 퇴고와 하반기 임강빈 선생 시전집과 유고시집 문제로 시비 건립 추진은 미룰 수밖에 없었다. 20189, 시전집과 유고시집을 만들면서 임창우와 시비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었다. 2019125일 시전집 출판기념식을 마치고 최종태 선생께 전화하여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어찌 된 건지 그동안 궁금했다고 하셨다.

둘째 계단
20193~4월 두 달 동안 제주도로 묵언 수행을 다녀와서 본격적으로 시비 건립 제안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522, 나름대로 작성한 서류를 들고 시청 문화예술정책과를 방문했다. 박헌오 선생 덕분에 들어가긴 쉬웠지만 담당자는 조형물 조례법이 생겨 안 된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송시열이나 신채호 등을 운운하며 우리도 모르고 시민들이 모르는 시인의 시비를 왜 세우느냐는 것이었다. 과장이, 문인이나 주민들 서명을 많이 받아오라는 팁을 줬다. 실망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최종태 선생의 시비 설계 스케치를 추가하고 열심히 신청서를 보완 작업하여 65일 다시 시청 문화예술정책과를 방문했다. 그제야 비로소 건립 신청서와 계획서 양식을 내어주었다. 최종태 선생 스케치 영향일 거라고 나는 이해했다. 팀장은, 20151218일에 <공공조형물의 건립 및 관리 등에 관한 조례>가 엄격하게 제정되었고, 20174월에 1, 8월에 2차 개정이 되어 절차가 더 복잡해졌다는 설명을 하며 쉽지 않을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동안 작성한 서류는 모두 무효, 하지만 희망이 조금 보였다. '이제 진짜 일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단체가 함께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안 되어 단체장 개인들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대전의 문학 단체장에 국한하지 않고 대중들도 알 수 있는 서울의 시인과 단체장의 추천서를 받고 추진위원회에 이름을 적어넣기로 마음먹었다. 김남조(시인, 예술원회원), 이근배(시인, 예술원회원), 김용재(시인, 현대시협 이사장), 신달자(시인, 예술원회원), 윤석산(시인, 한국시협 회장), 유안진(시인, 예술원회원), 이광복(시인, 한국문협 이사장) 등 대선배 문인들께 추천 부탁 전화를 했다. 이광복 소설가는 박헌오 선생이 전화하여 부담을 덜었다. 620일에 추천 요청 글과 추천서, 우표 붙인 반송봉투를 함께 동봉하여 우편 발송했다. 고맙게도 김남조 선생을 제외하고 추천서를 모두에게 받았다.
추진위원회를 잘 구성해 보려고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며, 임강빈 선생의 공적 자료와 문학적 자료 수집 등 시청에서 받아온 서류의 빈칸 메우기에 전념했다. 인터넷과 도서관, 대전문학관과 유가족을 통해 모은 자료를 A4 용지로 99쪽을 편집했고, 최종태 선생의 시비 설계 스케치도 71일 다시 받아 계획서에 붙여넣었다. 사사건건 남의 손을 빌려야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편집 경험이 있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다. 그리고 한 달여 간 임창우가 주민서명 100여 명, 나와 박헌오 선생이 문인서명 60여 명, 기관장이나 지역 문학 단체장 등의 추천서를 총 50여 부 받았다.
201977, 나태주 선생 조언으로 최원규 선생을 추진위원장에 모시기로 하고 다음 날 찾아가 허락을 받았다. 공동추진위원 구성에 약간의 잡음이 생기는 바람에 편안하지 않은 대전 문학단체의 현주소와 갈래를 엿보았다. 며칠 후 박헌오 선생이 뭐가 못마땅한지 지나가는 말처럼 나는 현 단체장이 아니라 공동추진위원에서 빠져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시청 일이 아직 안 끝났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책임추진이라는 명사를 추가로 붙였다. 그렇게 한고비를 넘기고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신청서나 계획서를 만들고 심의자료를 만들 때 추진위원회를 단단히 꾸려 시청에 보여줘야 하므로, 전화나 문자메시지 등으로 3029에게 성함 적는 걸 허락받았다. 어려운 1은 숙제로 남겼다.
2019710, 수소문 끝에 김영훈 아동문학가로부터 대전의 6개 중등학교 임강빈 작사 교가를 알아내어 임창우 도움으로 각 학교로부터 악보를 받았다. 716, 조심스럽게 나는 최종태 선생께 계획서 작성 중 필요한 디자인 콘셉트 글과 이 일이 성사될 경우 필요한 비문(碑文)을 써달라고 부탁드렸다. '비문은 시인이 써야지' 했지만 결국 허락하셨다. 다음은 720일 받은 선생의 콘셉트 글이다.

시인 임강빈의 인품과 시세계가 소박하고 고요하고 단정하여 ‘고귀한 단순’으로 보였다. 그것을 상징화하기 위해서 가장 한국적인 화강석을 취재키로 하였고, 돌의 물질성을 극대하게 살리면서 시인의 이미지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형상화해 돌에 새기기로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소박 강직한 화강석 덩어리로 하여금 영원히 여성적인 것으로 승화시켜서 품격을 더하여 여백의 미를 구현코자 한다. 이 헌정의 기념물이 임강빈 시인의 시정신을 만세가 기리도록 정성을 다할 것이다. (2019년 7월 설계자 최종태)

이 글을 읽고, 오래전 임강빈 선생 편지를 타이핑하다 울었듯 나는 또 울었다. 반세기가 더 지났어도, 이승과 저승으로 길이 나뉘었어도 변함없는 두 분의 우정에 감동하여 새로운 힘을 얻었다. 그 힘으로 자료를 하나라도 더 찾아내려고 인터넷을 뒤지고 책을 뒤적거리며, 또 이것저것 복사해 달라고 임창우까지 괴롭혔다. 안 될 수도 있음을 알면서 함께 노력한 임창우, 부탁하면 다 들어주는 동생 같은 그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탁상공론은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으나, 82일 오전 11시 태화장에서 공동추진위원 동의서도 받을 겸 한 번은 모이기로 했다. 일일이 전화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냈으나 추진위원장, 공동추진위원 72, 재정위원 1, 사무차장과 임창우와 나를 포함 총 7이 참석했다. 괜한 일을 한 거 같았다. 추진위원회라고는 하나 자금이 한 푼도 없어 식비는 임창우가 계산했다. 나머지 불참 공동추진위원들은 찾아가거나 식당에서 만나 동의서를 받고 이메일로도 받았다.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셋째 계단
나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1차로 편집한 신청서와 계획서 등 167쪽을 준비하여 201986일 문화예술정책과를 방문했다. 문화예술정책과 팀장이 애썼다며 접수했다. 접수한 서류는 행정안전부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두세 달은 걸릴 거라고 했다. 하여 1차 서류 중 발췌한 중요한 부분과 대한석상 이재순 석장에게 받은 시비 도면 등으로 도시경관과 심의도서 편집을 시작했다.
편집하는 동안 시비 모형도를 3d 렌더링해준 목원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박진수 교수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이와 비슷한 심의를 해본 그의 조언이 심의자료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미친 듯 컴퓨터에 매달려 혼자 일했지만 한 줄기씩 도움을 준 마음이 처처에 있었다. 절망하거나 지쳐 있을 때 전화하면 매번 다시 일어날 용기를 주신 서울의 정숙자 선생, 그리고 카톡으로 생뚱맞게 시비의 필요성을 묻거나 또 다른 내용 물어보면 성의껏 답해주던 문우들, 일일이 호명할 수는 없지만 참으로 고마웠다.
822일에는 시 마을저작권 승낙서’, 27일에는 시비 기부채납신청서를 이메일로 받아 작성하여 담당자에게 보내고, 심의자료 A3 컬러 13쪽을 인쇄 준비까지 숨 가쁘게 끝내놓았다. 그리고 나는 91일부터 두 달 동안 예정되어 있던 담양의 창작실 <글을 낳는 집>으로 잠수했다. 다음은 1018일 담양에서 이메일로 받은 최종태 선생의 비문(碑文)이다.

임강빈 선생은 섬세하고 날카로우나 모나지 아니하며 일상의 평범한 말 속에서 시어를 찾았다. 세속에 물듦이 없는 맑은 영혼과 안분지족의 선비정신으로 오늘을 살고, 순수 무구한 시정(詩情)을 구도의 언어로 다듬었다. 그리하여 고귀한 여백의 미를 그려내었다. 사랑하는 시인이여, 당신을 아끼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담아 여기에 비를 세우니 만세를 기억하며 함께할 것이다.

담양에서 대전의 일은 잊고 평화롭게 책읽기와 시쓰기를 하면서 보내던 중, 1023일에 심의한다는 전화를 담당자로부터 받았다. 다음날 다시 114일로 잡혔다고 연락이 왔다. 하여 심의자료 도서를 만들고 시뮬레이션 영상을 만들어야 했으므로 말일까지 머물지 못하고 1027일 귀가했다.
귀가하자마자 시청 담당자가 기부심사위원회에 심의를 받아야 하니 시비의 사용목적, 사용용도, 기탁사유 등을 지정기탁서에 써서 보내라고 했다. 나름대로 써 보냈더니 구체적으로 다시 써서 보내라고 했다. 쓰고 또 쓰고……, 비슷한 내용의 사유, 용도, 필요성 등을 하도 써서 피로감이 폭발 수준이었다. 몇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고민하다가 어렵게 추가 작성하여 114일 아침에 다시 이메일로 보냈다. 며칠 후 기부심사위원의 심의가 늦어져 디자인팀 심의도 연기되었다며 또 기다리라는 전화가 왔다. 기다리라고 하면 한두 달은 그냥 흘려보내기 일쑤였다. 바빠서 그렇겠거니 짐작하면서도 쌓인 답답증은 해결할 길이 안 보였다.
115, 심의자료를 점검하다가 임강빈시전집 간행위원회에 성함 넣으려다 못 넣은, 몇 달을 숙제로 남겨놓았던 조남익 선생께 전화했다. 그런데 소문을 들었다며 추진위원에는 당연히 넣어야 하고, 여럿이 상의해야지 그 일을 황희순이 왜 혼자 하느냐며 뜬금없이 화내셨다. 작성할 서류가 많고 수시로 처리해야 할 서류가 생겨 상의할 수 없고, 시청 인가 못 받을지도 몰라 공론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라며 나중에 욕먹을 거라고 언성을 높이셨다.
전화를 끊고 한나절은 누워서 앓았다. 아니 며칠 더 앓고 싶었다. 정신없이 달려온 수많은 시간과 고투하며 작성한 서류들이 나를 짓눌러 눈물이 났다. 욕을 먹는 건 상관없다. 공론화시켰다가 안 되면 어쩔 것인가. 일도 아슬아슬한데 탁상공론하면 배가 산으로 갈 것이다.
한 달 만인 1129, ‘지정기탁서가 통과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127, 도시디자인팀 심의 날짜가 18일로 잡혔으니 심의도서 15부를 제작하여 제출하라고 했다. 첨삭을 반복하며 점검하고 또 점검하여 심의도서를 20부 제작했다. 심의하는 날 최종태 선생이 오셨으면 좋겠다고 전화를 드렸더니 알았다고 하셨다. 박헌오 선생이 설명하기로 하고 임창우도 함께했다.
심의 날, 시뮬레이션 영상도 준비했으나 기계가 고장이 나서 도서로만 심의했다. 심의위원들의 특별한 질문은 없었다. 그런데 시비 디자인 부분을 설명하는 박헌오 선생이 엉뚱하게 시비 3d 렌더링한 페이지가 아닌 좌대만 지운 <기도하는 사람> 조각품 이미지를 펴놓고 설명했다. 발이 없는 3d 렌더링한 이미지는 심의위원들에게 밋밋하게 느껴졌는지 발을 새겨넣으라는 거였다. 시비의 앞면에 발이 튀어나오면 위험하므로 최종태 선생과 합의하여 없애기로 했는데……. 이미 심의위원들이 발이 있는 작품을 보아 버렸으니 방법이 없었다. 하여 202016, 발을 붙이면 안 되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고, 약력이 길다고 하여 11줄로 줄이고, 시비는 보도에서 2m 거리에 세우기로 하고 심의결과 조치사항서식을 작성하여 이메일을 보냈다. 이로써 제6회 대전광역시 공공디자인위원회 심의는 재심의나 디자인 변경 없이 무사통과되었다.
인가 공문만 받으면 이제 일을 시작해도 된다는 생각에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202018, 공원녹지과와 공원관리과 심의가 남았다는 전화가 왔다. 뒤통수 맞은 느낌이었다. 이 일을 최종태 선생께 알려드렸더니 시비 세우는 걸 미루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잘 될 거라고, 안 될 이유가 없다고, 오히려 풀죽은 나를 위로해 주셨다.
2020530일까지 건립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와중인 2020113일에 A모 시인에게서 임강빈 시비 세우게 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는 전화를 받았다.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임강빈 시비를 검색하면 웹 사이트에 기사가 뜬다고 했다. 검색해 봤더니 박헌오 선생이 제보하고 이해미 기자가 쓴 2019. 12. 26. <중도일보> 기사가 있었다. 내게 묻지도 않고 왜 허위사실을 제보했을까. 기사가 나왔다는 말도 왜 하지 않았을까.

기사 제목 : '대전의 3가 시인' 임강빈 시인 시비 보문산에 세워진다
(승인 2019-12-26 08:35/수정 2019-12-26 08:35/신문게재 2019-12-26 5면)
※ 기사 중 잘못된 부분만 옮겨 밑줄을 그어놓았다.

1. 문학계 원로들이 대전시와 시비 건립을 조율했다. ⇒ 문학계 원로들이 대전시와 조율한 적 없다.
2. 디자인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재심의 결론 ⇒ 디자인은 보완하지 않았고 재심의 결론도 나지 않았다.
3. 디자인만 변경하면 되는 일 ⇒ 디자인은 한 군데도 변경하지 않았다.
4. 디자인 재심의가 통과되면 시비 건립 착수 ⇒ 재심의는 없었고, 앞에 설명했듯 심의결과 조치사항은 약력을 간단히 하라는 것밖에 없었다. 그때가 2019년 12월 26일, 시청 담당자 말대로 반도 못 온 상태여서 건립 착수는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5. 박용래 시인이 작고한 뒤 시비가 보문산에 세워지자 나중에 만약 내 시비가 세워질 수만 있다면 이곳이 좋겠네.”라고 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 박용래 시비를 임강빈 선생이 추진했는데 그때가 1984년 53세, 선생의 성정으로 무슨 시비가 세워지면 좋겠다고 했을까. 25년 동안 임강빈 선생은 당신의 시비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별세 두 달 전, "만약 시비를 세운다면 시 <민들레>가 어떠하겠느냐."는 말 한마디가 내가 들은 전부다.
※ (박헌오 선생에게 2020년 7월 27일, ‘임강빈 선생님이 욕심이 있는 시인으로 남을 터이니 위 5번 내용은 꼭 수정해야 한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인 7월 28일, 아래와 같이 수정된 것을 확인했다.)
5―1. 박용래 시인이 작고한 뒤 시비가 보문산에 세워지자 임 시인의 지인들 사이에서 나중에 만약 임강빈 시비가 세워질 수만 있다면 이곳이 좋겠다.”라는 의견이 나왔던 것으로 알려졌다.”금시초문인 이 내용은 또 누구에게 들은 걸까. 박용래 시비 가까이 임강빈 시비를 세워야겠다고 결정한 건 필자였다. 그걸 알고 있을 텐데도 왜 허위사실을 기자에게 말했을까 이해하기 힘들었다. 

넷째 계단
2020129,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대전광역시 도시계획시설(사정근린공원) 도시관리계획 결정(변경) 신청서><도시계획시설사업 실시계획인가 신청서(사정근린공원)>를 이메일로 받았다. 문화예술정책과 담당자가 바뀌어 약간의 혼선이 있었다. 받은 서류는 숫자와 법률용어들 뿐이었지만 일이 단순하니 어떻게든 해보려고 20일 동안 부여잡고 씨름하다 어쩔 수 없이 용역을 맡겼다. 이 과정이 남았다는 걸 전 담당자도 몰랐던 모양, 실망하는 나에게 현 담당자가 약식으로 서둘러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316, 용역 맡긴 서류를 받아 시청에 제출하고 202041일부터 말일까지 정읍의 고택문화체험관에 들어가 있기로 했다. 독서와 창작은 핑계, 대전을 떠나고 싶었다. 45일 오후, 동진강변 산책 중이었다. 시청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실시해도 된다며 한 달 정도 뒤에 인가고시 공문이 갈 거라고 했다. 바로 최종태 선생께 소식을 전했더니, ‘허허허기뻐하시며 돌은 바로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한 달을 잘 보내고 말일 대전에 왔다. 이제 진짜 시비를 세우게 되었으니 또 다른 마음을 준비해야 했다. 이제 사람을 상대해야 했다.
54일에 박헌오 선생을 만났다. 시비 세울 계획서와 계약서를 써야 한다며 추진위원들이 논의하자는 거였다. 후원금만으로 시비를 세울 것도 아니니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탁상공론은 하지 않겠다고 미리 말을 해놓은 터였다. 그분은 여러 번 싫어하겠지만이라는 말로 운을 떼며 대한석상과 계약서를 쓰고 후원금과 유족 지원금 등 시비에 쓸 자금을 계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후원금을 예정했다가 남거나 모자라면 어떡할 거냐 했더니, 만원이라도 남으면 후원자들에게 1/n 하여 돌려줘야 한다는 등의 억지스러운 설명으로 언성을 높였다. 소통이 안 돼 최종태 선생께 여쭤보려 전화했다. 대한석상과 40년 이상 일을 했어도 계약서를 써본 적 없으니 믿고 가자 하셨고, 형식적인 건 되도록 생략하라 하셨다. 내 생각도 그러했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해줄 거라고 하셨다. 박헌오 선생 혼자만의 생각이었으므로 불협화음은 바로 종료되었다.
시비 제작비도 마련되어 있고 내가 맡은 일을 떼어놓고 바라보면 이 사업의 그림은 단순했다. 시청 드나드는 일을 도움받고, 다른 공동추진위원보다 조금 더 관심 가져주길 바라고 책임추진을 붙여놓은 것이지 정말 책임을 지고 추진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모든 일은 내가 시작하여 내 손에서 서류가 작성되고 일이 추진되었으니 내가 손을 멈추면 모든 일은 일시에 멈춰졌을 상황, 언제 어디서든 이 일에 앞장서서 이리 왈 저리 왈 하는 것은 경위에 맞지 않았다. 더구나 일 막바지에 말이다. ‘중도일보허위기사 제보도 그렇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일이 성사되었으니 끝까지 잘 참아야 했다.

다섯째 계단
202057<대전광역시 도시계획사업 실시계획 인가고시 2020-85> 서류를 이메일로 받았다. 58일 자로 인가, 꿈만 같았다. 이 일 또한 최종태 선생께 제일 먼저 알려드렸다.
건립기념식은 김용재 선생과 상의하여 임강빈 선생 돌아가신 날인 716일 오후 3시로 결정했다. 59일부터 2~3일 동안 인가고시와 기념식 소식을 처음으로 추진위원과 문인 등 100여 명에게 우편과 SNS로 알렸다. 문인들 후원금을 조금이라도 보태야지 유가족이 온전히 시비 제작비를 책임졌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아 후원금 통장도 만들었다. 하지만 문예지에 게재한 시비 건립 안내 광고에만 공개하고 개인에게 보내는 서신에는 공개하지 않았다. 유가족의 심적 부담이 크겠지만 임강빈 선생 생전의 성정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흔쾌히 시비 건립 안내 광고를 해준 문학시대’, ‘월간문학’, ‘충남시인협회’, 그리고 기념식 안내까지 해준 충청예술문화에 감사한다.
520, 이진우 선생을 만났다. 차를 마시며 최종태 선생이 쓰신 시비의 비문, 그것도 이미 음각을 마친 사진을 보여드렸다. 그런데 글 중 시정(詩情)을 시정(時情)이라고 새긴 걸 이진우 선생이 발견하셨다. 잠시 현기증이 났지만 바로 정신을 차리고 대한석상에 전화했다. 새 돌에 다시 새기기로 했다. 최종태 선생께 편집해서 이메일로 보낸 글을 복사해 작업한 줄 알았더니 타이핑하여 작업한 모양이었다. 이미지만 보고 글자 교정을 보지 않은 내 실수였다. 이진우 선생을 그날 만나지 않았더라면 틀린 글자 그대로 시비를 세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그 소동이 번개처럼 지나가고 제작과정 사진도 찍을 겸 임창우와 구리시 동구릉로 500-29 대한석상527일 방문했다. 그곳엔 최종태 선생도 오셨고, 서울에 사는 임 선생의 장녀와 차남까지 와서 3남매가 모였다. 잘 되고 있다고 최종태 선생이 설명해 주셨다. 작업이 거의 다 된 거 같았다.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겁도 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섯째 계단
68, 드디어 기초공사가 시작되었다. 잘 자라고 있는 작은 목련 세 그루 이식하는 일이 걱정이었지만 그 자리가 아니면 안 될 거 같아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삽을 들고 잔디와 흙을 퍼 나르며 일을 했다. 자청한 일이니 힘들어도 즐거웠다. 며칠 동안 산을 오르내리며 땀도 많이 흘렸다. 신기하게도 일할 땐 구름이 해를 가려주고 일이 끝나면 비가 오고, 하루하루가 꼭 이 일을 위한 날만 같았다. 그리고 617일 국가무형문화재 120호 이재순 석장이 시비 설치를 위해 기초공사 상태를 살피러 내려왔다. 기초공사는 잘 되었는데 주변 잔디 심은 곳을 설치 후 조금 더 넓고 평평하게 파내라고 했다.
623일에 드디어 시비 설치가 시작되었다. 리헌석 선생도 잠시 들르고 박헌오 선생도 오셨다. 시비가 제자리에 세워지던 순간의 감격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눈물이 울컥 솟았다. 문득 사정공원이 훤해진 듯했다. 감격도 잠시, 또 일이 생겼다. 박헌오 선생이 안 되는 이유가 조목조목 적힌 서류를 받아 보관하고 있다면서……, 나보다 자기가 먼저 시비를 만들려고 시청에 알아보았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황당하여 그 증거자료를 이메일로 보내라고 냉정하게 대꾸했다. 이튿날 증거자료와 함께 사과도 아니고 사과 아닌 것도 아닌 긴 글을 이메일로 보냈는데 결론은 착각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잠시 중단되었던 20175월 중순쯤, 시청 직원에게 설명 듣고 이메일로 그 서류를 받아 안 될 거라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서류(<대전광역시 공공조형물의 건립 및 관리 등에 관한 조례>)는 나도 설명 듣고 받았으나, 안 될 이유만 조목조목 적혀 있는 건 아니었다. 틀린 기억을 품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안될 거라 여기고 있었다니! 걸핏하면 욕심 없다는 말을 반복하던 사람이었는데 몇 차례 실망하다 보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100프로, 아니 200프로 즐거울 시간에 엉뚱한 일로 기쁨이 반감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비는 성공적으로 완성되었고 대한석상에 가서 제작과정을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사흘 후 기초공사를 도와준 임창우 친구 안모 씨가 포클레인을 동원, 주변 공사를 추가로 하고 잔디를 사다 심는데 함께 즐겁게 일했다.
202079, 시청 직원 셋이 나와서 준공검사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다음날 나는 이 사업의 진짜 마지막 서류인 공공디자인심의 이행결과’, ‘완료보고서’, ‘준공검사조서를 작성하여 이메일로 보냈다. 그날로 서류 작성하는 일에서 해방되었고 시청 직원들과도 이별했다. 이제 임강빈시비는 공히 공공의 조형물이 되었다.

에필로그
건립기념식은 코로나19도 문제였지만 날씨가 더울 터이니 최대한 간략히, 그리고 검소하게 치르기 위해 노력했다. 제막식도 생략하고 순서도 최소한으로, 초대장은 보냈지만 참석해 달라는 전화를 한 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책자는 알차게 만들려고 애썼다.
드디어 716, 시비 건립기념식이 시작되었다. 그다지 덥지도 않았다. 유가족이 마련한, 선생의 육필이 새겨진 손수건과 요깃거리도 산뜻했다. 사범대 시절 임강빈 선생을 짝사랑했다는 임성숙 선생께서 멀리 영종도에서 오시어 참으로 반갑고 고마웠다. 리헌석 선생의 플래카드 후원과 적극적으로 빌려준 행사에 필요한 마이크 등 집기는 큰 힘이 되었다. 마스크 쓰는 불편을 감수하고도 생각보다 많은 분이 오셨다. 행사는 조용하고 짧게(1시간) 무사히 마쳤다. 다음날 최종태 선생께서 행사도 잘했고 시비도 아주 잘 되었다며 기쁘게 전화를 주시어 뿌듯했다.
3년여의 긴 여정이 막을 내렸다. 다음은 간략한 임강빈 시비 건립 결산 내역이다.
후원금 : 7,210,000유가족 지원금 : 31,348,000
◉ 시비건립 총지출 합계 : 38,558,000

작품을 헌정하고 시비를 설계하신 최종태 선생과 어려운 일을 함께한 유가족에게 감사한다. 추진위원과 후원해 주신 여러분,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오신 분, 멀리서 가까이서 건립기념식에 참석하여 기쁨을 함께 나눈 모든 분께 감사한다. 임강빈 선생과 인연은 없지만, 이 일에 매진하는 나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준 문우들께 감사한다. 과정은 지난했지만 결국 인가해준 대전광역시청에도 감사한다.
열정을 다해 완성한 임강빈 시비는 생전의 외우(畏友) 박용래 시비와 가까이 서 있어, 달밤이면 두 분이 못다 한 정담을 나누실지도 모른다. 그 정담 들으러 달 밝은 밤 한번 가봐야겠다.
두 분의 시혼이 만세불변(萬世不變) 고즈넉이 함께 빛나리라 믿는다.

(2020년 8월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