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굽다 외/이강산
이강산 시 3편
시간을 굽다
속병 덕분에 방 한 칸 얻어 떠나와
맵고 짠 욕망과 인연은 그만 끓이겠다며 잠근 불판 위에 시계를 올려놓고
깜빡 침묵의 이불에 눕다 깨어보니
두 시 반이 아홉 시 반으로 익어버렸다
낮이 까맣게 타버렸다
방 가득
공복의 마음 가득
시간의 누룽지 냄새가 매캐하다
타다 만 모퉁이 시간을 마저 굽고 끓여낸 누룽지가 지장암 석탑이다
백 년쯤 홀로 견딜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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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
세상의 문 굳게 잠가두었던 소사나무의 가지가 입춘 즈음에 스스로 두엇을 내쳤다
겨울 추위가 유난했다
가지의 상처 너머 바람이 보인다
곡우부터 상강까지 갖은 바람들이 소사의 질긴 문 앞을 기웃거리다 돌아섰다
침묵으로,
더러는 나뭇잎의 머리채를 흔들며
소사 홀로 무거워지다가 스스로 가지를 비웠는지 모른다
바람의 마음을 읽었다면 다행이겠지만,
소사와 더불어 늙은 유구의 선생 곁에서 나도 소사처럼 서너 차례 월동하였다
그새 생의 잔가지 몇 점 늘었다
--가지를 비우고 바람의 틈을 열어야 나무가 사는 거야
소사 같은 선생의 말씀이란
내 생의 가지를 비우고 바람을 모셔야 한다는 것,
내가 바람을 모시는 게 아니라
바람의 빈 가지 틈에서 내가 살아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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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석류나무엔 그늘이 없다
유월 어디서든 석류나무 아래 서보면 안다
아, 석류!
반갑게 다가서다가
느닷없이 석류꽃에 맞아보면 안다
한순간 통증이 번지는 몸 어디선가
석류꽃 피멍이 드는 것처럼
붉고 뜨겁고 환해지다가
마음의 그늘마저 사라지는 것을 안다
행여 석류꽃의 물살에 잠기면
몸속의 도랑을 타고 오른 물소리에 젖어
언젠가, 유월 언젠가
당신의 나무 아래 서서
당신의 붉은 꽃에 맞아도 보고 싶다며
잠시 나를 잊는 나를 안다
___이강산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에서
___이강산 시인 : 충남 금산 출생/1989년 실천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시집 <모항> 외/장편소설 <나비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