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읽기·책읽기

<시가 태어난 자리> 여백의 미 중시한 서정시인 임강빈/주선미

섬지기__황희순 2019. 11. 4. 12:40

<시가 태어난 자리>

 

여백의 미 중시한 서정시인 임강빈

 

주 선 미(시인)

 

 

 

임강빈 시인은 1931222일 충남 공주시 반포면에서 출생했다. 반포초등학교, 공주중고등학교, 공주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1952년부터 44년 동안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1956년 박두진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했다. 1969당신의 손을 시작으로 열세 권의 시집과 작고하실 때까지 2권의 시선집을 출간하시고, 한평생 교육자로 살아오셨다. 임강빈 시인의 시 세계는 동양적 관조에서 출발한다. 시에 있어서 사상이나 시적 주제가 강조되고 있는 현실에도 묵묵히 개인적 서정을, 간결하면서도 여백의 미를 중요시 여기는 깔끔한 서정을 담아내고 있다. 2016년 소천하실 때까지 시인은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한다는 주관에 따라 산문을 쓰지 않았다.

 

눈보라 속

무수한 내가 있었다

 

어디서나

눈은 쌓이고 있었다

 

쌓이지 않는

강물이 소리 내며 있었다

 

길 따라

喪輿가 바삐 가고 있었다

 

발자국이

이내 지워지고 있었다

 

눈보라 속

무수한 내가 있었다

 

미이라처럼

강물은 누워 있었다

-某日전문

 

눈보라가 흩날리고 있다. 시적 주체가 흩날리는 눈송이들에 하나하나 이입되고, 그 눈이 쌓이고, 그 가운데 상여가 간다. 서경 묘사는 단순하면서도 행간에 수많은 언어와 감정이 생략되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 시는 눈이 오고 상여가 가고 있는데도, 감정의 미동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진솔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 속에는 조그만 사물에 대하여 단순한 구조로 간결하게 묘사하지만, 삶의 깊은 조명이 있고 정서의 끈끈함이 있다.

이 시의 소재는 눈보라, 강물, 상여다. 부분적으로 발자국, 미이라도 나타나지만 이들은 보조적 소재일 뿐이다. 그렇다면 눈보라와 강물과 상여는 어떠한 관계일까? 서두의 눈보라는 겨울의 대표적 상징으로 시련과 죽음의 이미지를 내포한다. 여기에 상여가 등장하는데, 이는 동질의 언어를 동질의 질감으로 표현하고 있다. 죽음에 대하여 시인은 직접 말하지는 않고 있다. 다만 강물이 소리 내며 있었다에서 그와 같은 상황을 상승적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시인은 죽음에 대하여 특이한 관점을 보여 주는데 요란한 슬픔이나 목 메인 안타까움을 설정하기보다는 발자국이/이내 지워지고 있었다고 담담하게 표현함으로써 인간도 결국은 자연의 일부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일부에서는 시인의 의지와 지향이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 그리고 현대 사회의 갈등에 초연한 것은 소극적 자세라고 평한다. 그러나 그것은 허정(虛靜)의 경지를 지향하는 시인의 문학적 특질일 터이다. 세속의 영욕에서 벗어나는 일이 어찌 수월할 것이랴. 시인은 들녘을 걸으며/ 연습을 한다// 하나둘 욕심을/ 버리는 연습을 한다.’(들녘에서)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말한다. 일제 강점기를 비유적으로 증거하는 작품은 놀랄 만큼 지사적 면모를 보인다.

 

순백의 꽃 이파리를

살포시 가지 위에 얹어 놓는다.

 

장날이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흰옷을 사랑하는 백성

 

일본 순사들이 숨어 있다가

흰 것이 눈에 뜨이기만 하면

검정 물감으로 그어댔다.

고샅으로 피해 다니고, 또 쫓고

조선의 마음을

뭉개버리려는 얄팍한 수법.

 

환한 백목련을 보면

그 광경이 선히 살아난다.

-백목련(白木蓮)전문

 

순백의 꽃 이파리를/살포시 가지 위에 얹어 놓는다.’는 목련나무 가지에 꽃이 피어났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는 백목련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흰 옷을 입었던 우리 겨레로 은유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인은 공주 장날이면 사방에서 흰 옷을 입고 모여들던 겨레들을 보았다. 그 흰 옷을 입지 못하게 하려고, 일본 순사들이 검정 물감을 그어댔다. 이는 조선의 마음을/ 뭉개버리려는일본인들의 얄팍한 수법이라고 시인은 증언하고 있다. 이 작품이 증언에 머물지 않고 문학적 예술성을 획득하는 것은 환한 백목련을 보면/ 그 광경이 선히 살아난다.’는 결미의 형상화이다. 순백의 백목련을 보면, 해방된 지 70년이 넘어도 일본 순사들에게 당하던 겨레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이런 작품은 증언과 고급한 형상화의 표본이 될 터이다. 또한 시인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시혼을 작품에 투영하고 있다.

 

눈물은 뜨겁고

오십이 훨씬 지나서야

철이 든 당신

혼자 있고 싶어하고

안으로 세상일 삭이는 당신

약해도 단단한 뼈

섭섭한 날 있다

맑은 물소리에 귀 세우는

당신은 아무래도 서정시인

-조금은 쓸쓸하고 싶다부분

 

시인이라는 직분은 참으로 고달프고 외롭다. 세상에서 운신할 자리가 옹색해 보일수록 시인의 자기를 위안하는 목소리는 뜨겁고 간절하다. 서정시인은 내면을 다스리는 시인의 소박한 언어를 담고 있다. 서정시의 본래의 성격은 내면 성찰에서 기인하며 그것을 시적인 언어로 옮기는 데 있다. ‘서정시인이라는 직분은 화려한 거리에서 어색하거나 빛바랜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며 이러한 거리에서 살자면 시인에게는 헛웃음과 섭섭한 일이 더 많기 마련이다. 세상의 불의에 분노하며 소리쳐 보고 싶은 열정을 지니고 있지만 진정한 그의 자리는 투쟁적 웅변가에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누구보다 뜨겁고 진실하다. 그는 빛바랜 시인, 그가 걷는 길은 인적이 드문 산길이며 억새풀과 함께 바람에 흔들리다가 만나는 것은 달빛이었다. 시인은 이처럼 쓸쓸하고 외로운 감정을 수반하지만 그 외로움이 시인의 내면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좀처럼 스스로가 본인을 내세우는 법이 없어 긴 생애와 깊은 업적을 조용히 마감한 고 임강빈 시인. 그에게 20여 년간 작품을 배우고 작품 출간을 도운 황희순 시인은 그를 가리켜 생전에 변변한 시선집 하나 남기지 않았을 만큼 욕심 없는 분이라고 말한다. 이제야 겨우 대전, 충남 시인협회 중심으로 임강빈 시인의 시비 건립 운동을 하고 있단다. 조속히 선생의 시비가 세워져 그의 족적을 후학들이 돌아볼 수 있기 바란다.


__<시와문화>(51호) 2019. 가을.  


**주선미 시인 : 2017시와문화등단. 시집 안면도 가는 길, 일몰, 와온 바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