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인생론
『쇼펜하우어 인생론』
<늙음에 대하여>에서
볼테에르 : 자기의 나이에 상응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자기의 나이에 상응하는 여러 가지 재난을 당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자기 성격과 잘 맞는 연령이 되면, 다른 연령기일 때보다 호감을 사는 사람이 된다. 청년기에는 사랑스러운 청년이었는데 그 후에는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경우고 있으며, 장년기에는 믿음직스러운 활동가였는데 노년기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지는 사람이 있다. 풍부한 경험에 의해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온화해져 노년기에 가장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도 있다.
애초에 인간의 성질 그 자체가 청년의 요소나 장년적인 요소, 또는 노년적인 요소 중의 한 요소를 갖추고 있어서 각각의 연령기가 이 요소에 일치하는 일도 있는가 하면, 반대로 교정적인 기능을 가지고 이 요소에 대항적으로 작용하는 일도 있다는 데에 기인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우리가 행하고 보고 경험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정신에 점점 그 흔적을 남기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분한 자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청년기뿐이며, 노년기가 되면 의식적인 생활의 반은 상실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생존의식은 늙어갈수록 긴장을 풀게 된다. 아무리 훌륭한 미술품이라도 몇천 번 보는 동안에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처럼 모든 사물은 점차로 의식을 표면을 스쳐 지나갈 뿐 별로 인상을 남기지 않게 되며 우리는 단지 눈앞에 닥친 필요에 의해서 일을 할 뿐, 나중에는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의식이 감퇴함에 따라서 세월의 흐름이 점차 빨라진다.
여행할 때는 한달은 집에 있을 때보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 그러나 몇 번이고 동일한 사물을 접하고 경험하는 동안에 지성이나 지각이 점차 둔해지므로 모든 사물은 의식 속에 들어오지 않고 그대로 지나가 버린다. 즉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떤 것에도 자극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화살같이 지나가버린다.
청년기에는 직관이 노년기에는 사고가 지배적이다. 따라서 청년기에는 시를, 노년기에는 철학을 위한 시기이다.
청년기에는 눈이 비친 인상에 의해 좌우되지만 노년기에는 오직 사고에 의해서만 좌우된다.
장수한 사람이 아니면 인생에 대해 완전하고 올바른 관념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언제까지 ‘본무대는 이제부터’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생애의 최초의 40년간은 본문 그 자체이며, 그 후의 30년간은 본문의 참뜻과 맥락 및 본문에 포함되어 있는 교훈과 묘미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해주는 해설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인간이 호라티우스의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다’는 정신, 즉 만물의 공허와 현세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상당히 나이가 든 후이다.
인생의 가치는 결국 얼마나 고통을 줄일 수 있느냐에 의해서 측정될 수 있을 뿐이다.
7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전도서’의 ‘헛되도다’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노년기에는 영지(英智)와 함께 비애의 그림자가 얼굴에 나타나게 된다.
권태에 빠지는 것은, 일생동안 관능적 사교적인 향락밖에 몰랐던 사람들, 정신을 풍부하게 하지도 않고 자신의 정신적 능력을 연마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다. 나이가 들면 정신적 능력이 감퇴하긴 하지만, 본래 풍부한 정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권태를 물리칠 만한 정신 능력은 남을 것이다. 노년기에는 무슨 일에 대해서 그 전체를 개괄적으로 대관하기 때문에 축적한 인식을 끊임없이 새롭게 종합함으로써 그 인식을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으므로 정신은 만족과 위안을 얻게 되어, 앞에서 말한 자연적인 손실은 보충되는 것이다. 노년기에 시간이 빨리 가므로 권태를 느낄 겨를도 없다.
일생을 우둔하게 살아온 대부분의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로봇화하여 언제나 같은 것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어떤 강한 자극이 주어져도 이미 그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던 것을 조금도 바꿀 수가 없다. 이러한 노인에게 어떤 외적인 자극을 주는 것은 모래 위에 글자를 쓰는 것과 같다.
나이가 많아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익은 자연사이다. 90세를 넘으면 안색이 창백해지는 일도 없이 앉은 채로,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는 것을 중지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망으로, 스페인의 속담 중에는 ‘오래 살면 재앙이 많다’는 속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