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강빈 유고시집 <서평>/시집에 묶이지 않은, 아름다운 숨은 꽃/김현정
시집에 묶이지 않은, 아름다운 숨은 꽃
__임강빈 유고시집 『나는 왜 눈물이 없을까』
김현정(문학평론가, 세명대 교수)
임강빈 시인(1931-2016)이 작고한 지도 어느덧 3주기가 되어간다. 그는 1956년에 박두진 시인에게 3회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작고할 때까지 13권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그는 평생 동안 올곧게 시인의 길을 걸어온, ‘선비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1월 임강빈시전집간행위원회에서 『임강빈시전집』을 발간함으로써 임강빈의 시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시전집에는 기존에 발간된 13권의 시집과 사후에 발굴된 미발표시를 묶은 유고시집에 수록된 시 등 그의 모든 시가 총망라되어 있다. 특히 그의 유고시집은 그의 마지막 시집 『바람, 만지작거리다』 발간 이후 쓰인 새로운 시 11편과 1997년부터 2016년 초반까지 쓴 시 중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 100여 편을 묶은 것으로, 시인의 새로운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시집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유고시집은 『나는 왜 눈물이 없을까』라는 제목을 달고 별권(別卷)으로 출간되기도 하였다. 이 글에서는 유고시집에 주목하여 이 시집의 특징 및 임강빈의 시세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유고시집 『나는 왜 눈물이 없을까』가 나오게 된 경위부터 살피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이 시집 발문 「선생님의 유작을 묶으며」에 따르면, 유작 100여 편은 1997년부터 2016년 작고할 때까지 6권의 시집의 발간을 도운 황희순 시인의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것으로, 시집으로 묶고 남은 미발표시라고 한다. 그의 시집에서 제외된 미발표시 100여 편과 유품 속에서 발견된 새로운 시 11편을 함께 유고시집으로 묶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던 황희순은 결국 임강빈 시인을 잘 아는, 여러 지인들과 시인들의 긍정적인 답변에 힘입어 유고시집을 출간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임강빈 시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다. “이승의 일은 산 사람들 몫이니 나무라셔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버리라고 하신 말씀 어긴 이 후학을 부디 용서해 주시기를…….”이라고 하여 간절히 용서를 빌고 있다. 이처럼 유고시집은 어려운 과정을 통해 나온 것이다. 자칫 영원히 묻히거나 사라질 수도 있었던 임강빈의 시를 잘 간직한 그의 꼼꼼함과 여러 시인들의 자문에 바탕한, 그의 열정이 어우러져 나온 의미 있는 시집이라 할 수 있다.
지금부터 임강빈의 미발표시 속에 감추어진, 아름다운 숨은 꽃을 천천히 음미해보기로 한다.
2
그의 유고시집의 구성을 보면, 시기별로 여섯 개로 분류하여 묶은 시와 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에서 5부까지는 1997년부터 2016년까지 지은 미발표시 100여 편이 다섯 시기로 나누어 수록되어 있고, 그리고 제6부에는 마지막 시집 이후 쓴 11편의 유고시가 실려 있다.
유고시집에 실린 시들은 이순(耳順)을 넘겨 쓴 작품들이다. 내용은 주로 유년시절을 추억하는 시, 자신을 성찰하는 시, 무소유에 관한 시, 자연의 섭리에 관한 시, 시인의 길 또는 시의 길을 보여주는 시, 후회와 희망에 관한 시 등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지나온 삶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시가 주를 이루고 있다. 먼저 시인의 분신과도 같은 그림자를 노래하는 시를 보기로 한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림자가 나를 따라다닌다
일거수일투족
하루 일과를 빤히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할 때가 있다
아플 때 먼저 아파한 적이 없다
따라다니기 지겹지도 않느냐고
내가 호통을 친다
어둑어둑하다
가장 그림자가 길다
집으로 돌아가야지
내가 울먹일 때
왈칵 울음을 참는다
그만큼 착하다
내 옆 잠자리에 드러눕는다
하루의 피곤은 잊기로 한다
__「동행同行」 전문
평생 함께 한 그림자에 대한 시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햇빛이 나면 나는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늘 동행하던 그림자에 대해 시인은 눈길을 준 적이 거의 없다. 시인의 보폭이 점점 짧아지고 걸음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시인은 자신의 그림자를 엿보기 시작한다.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며 묵묵히 동행해 준, 그림자의 이면을 보게 것이다. 시인이 걸어온 삶 그대로 동해해 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림자를 통해 내면 속의 무의식적 욕망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동행’해 주는 그림자를 통해 ‘묵묵함’과 ‘고요’의 소중함을 느낀 시인은 ‘큰 목소리’보다는 ‘낮은 목소리’로 세상과 소통한다.
낮은 목소리보다
발악하듯 큰 목소리가
판치는 세상
그러나 보아라
낮은 소리가 있어 네가 살고
큰 소리로 해서
내가 살지 않는가
나도 악쓸 수 있다
낮은 목소리가 편안하다
__「낮은 목소리」 일부
소음이 난무하는 ‘지금 이곳’에서 시인은 ‘낮은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다. ‘노이즈마케팅’이라는 말이 익숙해질 정도로 점점 큰 소리가 내지 않으면 남들의 시선을 끌 수도 없고, 남들에게 자극이 되지도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리기 위해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는 삶, 누가 알아주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삶을 반영하듯 ‘낮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는 ‘낮은 목소리’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낮은 소리가 있어 네가 살고/ 큰 소리로 해서/ 내가 살지 않는가”라는 구절에서 보듯, 낮은 소리가 있기에 큰 소리가 살 수 있고, 큰 소리가 있기에 낮은 소리가 살 수 있다는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두 목소리가 공존해야만 되는 현실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큰 목소리’에 묻힌 ‘낮은 목소리’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은 시인이 평생 동안 걸어온 군자의 길, 선비의 길과도 상통한다. 군자적인 삶과 달관의 경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시가 있다.
그래도 다행한 일은
절절한 귀뚜라미 소리는 그대로 놓고 간다는 것이다
슬픔 하나 훔칠 줄 모르는
간肝이 크지 못한 녀석들!
__「좀도둑」 일부
시인의 배포를 엿볼 수 있는 시이다. 소중한 물건을 도둑맞는 일은 속상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돈으로 다시 살 수 없는, 귀한 대상이 사라졌을 때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좀 다르게 접근한다. 좀도둑이 가져간 물건보다도 집에 찾아온 귀뚜라미의 안부에 더 관심을 보인다. 그 귀뚜라미가 내는 ‘절절한 소리’가 온전하다는 것, “절절한 귀뚜라미 소리”를 그대로 놓고 갔다는 것에 시인은 안도한다. “슬픔 하나 훔칠 줄 모르는/ 간肝이 크지 못한” 좀도둑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고, 그들의 삶까지도 연민의 시선으로 보려는 시인의 포용력을 읽을 수 있다. 인간의 삶 못지않게 자연의 섭리,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꾀하려는, 시인의 달관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그의 시 「노염老炎」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보인다. “이십사절기에는/ 입추가 더위 한가운데 있다/ 노염의 심술도 대단하여/ 쉬 꺾일 줄 모른다/ 늙으면 용심이 더 생긴단다/ 노추老醜라는 것// 버려야 한다/ 추한 꼴은 보이지 말아야 한다/ 욕심은 병 중의 병/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무성한데/ 어느새 노염이 한풀 꺾였다”(「노염老炎」)에서 말이다. ‘늦더위’를 뜻하는 노염(老炎)을 ‘노추(老醜)’라는 의미와 연결시킨 수작이다. 노염의 기승이 꺾이지 않는 모습을 보며 “늙으면 용심이 더 생”기는 ‘노추’라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나이 들수록 “버려야” 함을, 그래야 “추한 꼴”을 보지 않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욕심은 병 중의 병”이라고 하여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무욕의 세계를 추구한다. 시 「가치치기」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과실수의 가지치기를 통해 자신의 ‘가지치기’에 대한 생각을 펼치고 있다. 충실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가지치기를 하듯, 시인 또한 시적 열매를 맺기 위해 가지치기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좁은 공간의 확충”이며, 무엇으로 공간을 채우는 일보다는 점점 공간을 비우는 일인 것이다. 이처럼 끊임없이 채움보다는 비움을, 여백의 미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과감한 ‘생략’도 가능하다.
수식어를 붙이지 마라
참모습이 흐려진다
너덜너덜한 것 떼어버리면
얼마나 깔끔하랴
압축은 생략의 지름길이다
용감히 던져버려라
생략이 제대로 안 되는 건
굽이굽이 긴 인생뿐이다
살다가 구차스럽다 싶으면
이 생략법을 써보아라
살아가는 맛
조금씩 맛이 들어가리니
__「생략」 전문
‘생략’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는 시이다. 줄이거나 뺀다는 의미를 지닌 ‘생략(省略)’에 쓰이는 한자 ‘省’은 덜다 또는 빼다의 뜻을 지닌 ‘생’과 살피다라는 뜻의 ‘성’ 두 가지로 사용된다. 이를 유추해보면 구차한 것을 인생에서 무엇을 빼고 던다는 것은 인생을 살피고 돌아본다는 의미와도 밀접하다고 할 수 있다. “수식어 붙이지 마라./ 참모습이 흐려진다”라고 한 표현에서 시인이 걸어온 길, 추구해온 길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살다가 구차스럽다 싶으면/ 이 생략법을 써보아라/ 살아가는 맛/ 조금씩 맛이 들어가리니”라는 구절에서는 당시 고희를 넘긴, 시인의 오랜 연륜에서 나오는 경구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경지에 오른 시인에게 흔하디흔한 ‘호박꽃’도 새롭게 다가온다. 그는 “텃밭에 모종한/ 호박넝쿨 기세가 하도 좋아/ 수확을 미리 점치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 사항/ 두 개 애호박을 땄을 뿐/ 이미 있어야 할 늙은 호박은/ 보이지 않고/ 호박꽃 밭이 되어버렸다/ 내 생애 중/ 이처럼 예쁜 꽃 보기는 처음이다/ 예쁘다는 기준도/ 때에 따라 바뀐다는 것/ 이제서야 알겠다”(「호박꽃」)라고 노래하고 있다. 호박꽃보다는 호박이라는 열매가 더 사랑받지만, 시인의 눈에는 달리 포착된다.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여기저기 만발한 호박꽃이 더 예쁘게 다가온 것이다. “이미 있어야 할 늙은 호박”은 없지만, 그 자리를 차지한 호박꽃이 시인의 “생애 중” 가장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이 된 것이다. 독자들에게 미적 기준이 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발표시 중에는 작고하였거나 생존하는 문인 또는 예술인에 대해 노래하는 시도 여러 편 보인다. 그들에 대한 그리움 또는 귀감이 될 만한 점들을 표출하고 있다. 먼저 임강빈과 떼놓을 수 없는 시인이 박용래이다. 임강빈 시인이 중심이 되어 박용래의 시비를 세우고, 마지막까지 박용래 문학상을 운영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두 시인과 친분이 두터운 이문구는 소설집 『관촌수필』에서 “어엿한 인연이랄 것이 없는 두 시인이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과실에 빗대어 일컫기를 마치 홍시감과 같다고 하면 어떨는지 모르겠다. 홍시는 겉과 속이 한 가지 색깔이며, 어루만지기 더없이 부드러운 피부를 가졌으되, 외부의 강압적인 폭력만 작용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물러 터지거나 깨어짐이 없음에서이다.”라고 쓴 바 있다. 이문구는 박용래와 임강빈을 겉과 속이 같고, 부드럽고 늘 한결같은 시인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임강빈은 이미 「당신의 적막 – 박용래 형 생각」(『등나무 아래에서』, 1985), 「쓸쓸한 뜨락을 가득 채우며 – 박용래 형 영전에」(『등나무 아래에서』, 1985) 등을 통해 그에 대한 안타까운 죽음과 그리움을 표출한 바 있다. 2002-2004년에 지은 미발표시인 「박용래 시비詩碑에서」에서도 박용래를 추억하고 있다.
더러는 절필絶筆을 선언했다가
살그머니 다시 펜을 들기도 하더니
가을이라
좀이 쑤실 터이지만
여전히 침묵
기를 쓰고 자제 중이구나
술 하나는 실컷 하더니
왜 오늘은 이리 째째한 거냐
어깨 너머로
적단풍이 들썩들썩하는데
까칠한 턱수염
말끔히 면도하고
허리 펴고 서서
그 흔한 눈물 흔적은 왜 안 보이냐
__「박용래 시비詩碑에서」 전문
시도 절제하여 쓰고, 술도 잘하고, 눈물도 흔한 막역한 시우(詩友)인 박용래 시인을 그리워 하고 있는 시이다. 그가 떠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고 물처럼 겸손하고, 학처럼 깨끗하게 살다간 김대현 시인을 기리는 시를 쓰기도 한다. “한라산에서/ 충청도 물에 발을 담그고/ 사유思惟에 깊이 잠겨 있는/ 이 나라 시인”(「김대현金大炫 시인詩人」)이라고 말이다. 또한 김대현 시비 제막식에 가는 중에 지갑을 집에 두고 와 다시 허둥지둥 택시를 타고 가는 모습도 보인다. “여기는 시간이란 개념이 따로 없고/ 무일푼으로도 통하는 세상이니/ 허둥대지 마오// 카랑카랑한 운장雲藏의 목소리가 따뜻했다”(「무일푼」)라는 구절에서는 평소 군자처럼 살다간 운장 김대현의 따뜻한 육성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이 외에도 다재다능한 예술인인 최문휘를 노래한 시(「다능多能한 재인才人 최문휘 崔文輝」),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오직 시만을 위해 살다 간 초정 시인을 기리는 시(「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길입니다 –초정艸丁 김상옥金尙沃 선생」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꿈을 주고 살아가게 하는 힘을 준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를 그리워하고 있는 시도 썼다. “당신은 늘 혼자이기 때문에/ 특별히 웃기는 연습은 없을 것입니다/ 타고난 기교입니다/ 당신의 무성영화는/ 꿈이 있습니다/ 살아서 파도치게 합니다”(「채플린 선생」)라고 말이다. 시집에는 발표하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군자의 삶을 지향하고, 군자와 닮은 삶을 살아가는 데 귀감이 될 만한 예술인들을 그는 시적 대상으로 끌어온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생기는 ‘노욕(老慾)’을 줄이고, 자연과의 조화를 꿈꾸고,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일에 힘을 쏟은 것이다. 1997년부터 2016년까지 발간된 시집에 발표되지 않은 미발표시를 중심으로 임강빈의 내면세계와 시세계를 두루 살펴보았다.
유고시집 6부에 해당되는 시는 시인이 마지막 시집 『바람, 만지작거리다』를 발간한 이후부터 작고 시까지 두 달여 동안 쓴 시편들이다. 이 시들의 특징은 생의 마감시간을 아는 듯, ‘혼자’에 대한 단상 및 공동체 마을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다는 점이다. 먼저 ‘혼자’에 대한 단상을 보기로 한다.
첩첩산에 오릅니다
물론 혼자입니다
희미하게 마을이 보이더니
이내 끊어졌습니다
개 짖는 소리도 없습니다
새들도 다른 산으로 옮겼는지
적막이 흐릅니다
꽃은 나무 아래 숨어버렸습니다
바람만 세게 불어댑니다
이 산에는
나 혼자인 것 같습니다
육중한 덩치에 반했고
여간해서는 미동도 하지 않을
그 믿음 때문에
산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전부 버리기로 했습니다
아직 남아있는 작은 욕심을 말입니다
__「첩첩산에 오르다」 전문
시적 화자가 혼자 산을 오르는 이유는 육중한 덩치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이 믿음으로 시적 화자는 산에 “아직 남아있는 작은 욕심”까지 마저 버리기로 다짐한다. 산을 통해 자연섭리를 배우고, 무소유를 배우고, 계절에 따라 순응하는 모습도 배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을 감싸안는 포용력도 배운다. 시인은 이 산을 닮기 위해, 홀로 산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시 「주량酒量」에서도 혼자 술을 마시며 여유를 찾고, 여유를 즐기고 있다. “외압”이 없이 혼자 “생각하며 마”시는 술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시 「시집보낸다」에서는 마지막 시집이라는 의미가 잘 담겨 있다. 시인은 “시집詩集을 시집보낸다// 딸 시집보낼 때는/ 섭섭함 반 시원함 반/ 반반이었는데/ 오늘은 좀 다르구나/ 마지막 시집이라는 생각에/ 왈칵 섭섭함이 달라붙는다// 짧은 인생/ 길게 살았다/ 시가 한몫 거든 셈이다/ 이제는 서둘 필요가 없다// 오늘 시를 묶어서 시집보낸다”(「시집보낸다」)라고 노래한다. 딸을 시집보낼 때는 섭섭함과 시원함이 반반이었지만, 이번에 시를 묶어 시집보내는 시인의 심정은 여느 때와 다르다. 이 시집이 마지막 시집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시집 낼 때는 다음을 기약하고, 좀 더 나은 시집을 묶어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을 텐데, 이번에 내는 시집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더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시인은 “이제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라고 하여 여유를 보인다. 시인의 마음이 잘 담겨 있는 시이다.
그리고 유고시집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공동체 마을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는 시도 있다.
옹기종기
노랗게 살아가는 마을이 있다
기웃거리지 마라
곧게 자라라
가볍게
더 가벼워져라
서로가 다독거리며 사는
민들레라는 따스한 마을이 있다
__「마을」 전문
민들레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것처럼, 기웃거리지 않고 가볍게 살아가고 싶은 심정을 담아내고 있는 시이다. 이렇듯 “서로를 다독거리며 사는” 따스한 마을을 시인은 꿈꾸고 있는 것이다.
3
그의 미발표작과 유고시를 모은, 유고시집 『나는 왜 눈물이 없을까』는 자아성찰의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자아성찰을 통해 욕심을 버리는 법을 배우고, 귀감이 되는 이들의 음성도 듣게 되며, 역발상을 통해 자연의 섭리를 깨닫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데, 이는 오늘날 공동체적인 삶에서 개인주의적인 삶으로 나아감에 따라 파생되는, 어쩔 수 없는 ‘혼밥’, ‘혼술’이 아니라 스스로 사색하고 향유하는, 일종의 ‘혼자’의 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시인을 괴롭혀 온 ‘귀울음’ 등 질환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달관의 경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평생 동안 시를 쓰고, 발표하고, 시집을 낸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낀다. 때로는 “쉽게 시詩가 쓰여진 날은 불안하다”(「쉽게 시가 쓰여진 날」, 『비오는 날의 향기』, 2000)고 반성하기도 하고, “짧은 인생/ 길게 살았다/ 시가 한몫 거든 셈이다”라고 하여 시와 동행한 삶을 다행으로 여기기도 한다. “시인이란 자격증이 따로 없다/ 그것을 필요로 한다면/ 나는 벌써 열외로 밀려 있어야 한다”라고 하여 시인으로 살아온 삶에 대해 반추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유고시집은 임강빈의 삶과 문학을, 그리고 그의 시세계를 살피는 데 매우 소중한 시집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미발표시를 통해 임강빈의 무의식적 내면 풍경을, 그리고 마지막 시집 이후에 쓰인 유고시를 통해 시인으로서의 마지막 메시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임강빈의 유고시집에 실린, 그의 아름다운 숨은 꽃의 향기가 멀리 퍼지기를 기대해본다.
__《호서문학》 6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