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강빈 선생님 유고시집 <나는 왜 눈물이 없을까> 발문
___임강빈 선생님 유고시집 <나는 왜 눈물이 없을까> '발문'
선생님의 유작을 묶으며
황희순
“내가 죽거든 발표 않고 버려둔 시를 유고시라고 내돌리면 절대 안 된다.”
선생님 떠나신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주기가 지나갔다. 생전에 여러 번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며 컴퓨터에 저장된 글들을 꺼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거 없애라니까 아직도 놔둔 거여?’ 선생님 음성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지만 지우지 못하고 더 깊이 숨겨놓았다. 지구상에서 나밖에 모르는 이 유작들을, Delete 키 몇 번만 누르면 사라질 선생님의 이 숨결들을, 정말 지워야 하나?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민했다.
고민하다가 나의 문우들과 선생님과 각별하였던 서정춘 시인 등에게 자문을 구했고, 제자인 평론가인 리헌석 씨에게 생전에 하신 말씀과 유작 이야기를 어렵게 꺼냈다. 모두 긍정적이었고, 특히 서정춘 시인은 선생님이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 하지만 황희순의 안목을 믿는다고 했다. 특히 리헌석 씨는 말이 끝나자마자,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시집으로 묶는 게 좋겠다며, 자신이 그걸 보관하고 있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한 글자도 지우지 않고 벌써 묶었을 거라고 했다.
하긴, 언제 다시 선생님의 새로운 시를 볼 수 있겠는가. 시에 대한 선생님의 결벽성과 여러 차례 하신 말씀 때문에 세상에 내놓을 생각을 여태 않고 있었지만, ‘임강빈 시인’을 그리워하거나 기억하는 이들을 위해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된 듯했다.
하여 20여 년 전인 1997년부터 저장해 둔 유작 100여 편(8시집에서 제외된 시, 9시집에서 제외된 시, 10시집에서 제외된 시, 11시집에서 제외된 시, 12시집과 13시집에서 제외된 시)을 한편 한편 깊이 챙겨보았다. 프린트해 드린 시들이지만 모두 새로워서, 선생님을 만난 듯 읽는 내내 즐거웠다. 타임머신을 타고 선생님과 시간여행을 한 셈이다.
선생님 주머니엔 여러 번 접은 A4 용지가 항상 들어있었다. 그 종이엔 완성되었거나 퇴고 중인 시가 적혀 있었고, 완성되었다 싶으면 읽어보라며 내놓으셨다. 나는 그 시를 가져와 <임강빈선생님방>에 저장한 후 프린트해서 가져다드리곤 했다.
내 컴퓨터에 선생님 시를 저장하기 시작한 건, 1997년 일곱 번째 시집 <버들강아지> 발간 직후부터였다. 열한 번째 시집(2007년) 발간까지, 시집 낼 때마다 모아둔 원고를 정리해 출판사에 파일을 넘겨주곤 했다. 그 이전인 1993년 여섯 번째 시집 <버리는 날의 반복> 발간도 내 손을 거쳤고 마지막 시집 <바람, 만지작거리다>도 꼼꼼하게 교정을 봐 드렸으니, 꽤 오랜 세월 동안 선생님 시의 첫 독자로서 즐거움을 누렸다.
결심을 하고 나니 후련하다. 선생님도 생전에 잊고 계셨을지 모를 시 94편과, 마지막 시집 발간 이후 2개월 동안 쓰신 11편의 시(돌아가시기 닷새 전, 시집 내고 시 10편은 썼다 하신 말씀 따라 유품인 습작용지 속에서 찾아냄)를 함께 묶는다. 그리고 기력이 다할 때까지 펜을 놓지 않으신 흔적/육필을 시와 나란히 싣는다. 시집 제목은,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눈물이 안 나오더라’는 말씀이 기억 나, 유고시 <눈물 한 점>의 한 구절을 가져와 <나는 왜 눈물이 없을까>로 정했다. 모든 정리가 끝났으니 이제 또 다시 선생님과 작별해야 한다.
유고시집은 없을 터이니 당신 생애 마지막 시집이라 여기시고,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나온 시집 <바람, 만지작거리다>를 사인까지 하여 지인들에게 발송하는 일을 말끔히 마치신 거 같다.
이승의 일은 산 사람들 몫이니 나무라셔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버리라고 하신 말씀 어긴 이 후학을 부디 용서해 주시기를…….
“…… 꽃을 보려고 사람들은 다투어 모여든다. 처음엔 오솔길이다가 나중엔 큰 길이 생긴다. 나도 그 길을 따라 나서지만 아직도 그 실체를 모른 채 첩첩산중을 헤매고 있는 꼴이다.”(2000)
선생님의 여덟 번째 시집 <비 오는 날의 향기> ‘시인의 말’ 부분이다. 이제는 실체를 아시고 이승에선 느낄 수 없을 평안을 찾으셨으리라.
선생님의 명복을 두 손 모아 간절히 빈다.◈
2018년 11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