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읽기·책읽기

조각보 연대기 외 3편 / 박미라

섬지기__황희순 2018. 2. 6. 20:48


박미라


조각보 연대기 외 3편



이것은 어떤 감옥의 평면도이다

꽃이었다가 물이었다가 타오르거나 가라앉은

모서리들의 힘으로 간혹 눈부시다


빈틈없이 맞물린 도형들 사이를 비집어

붉은 모란 한 송이를 꽂는다

향기 없는 꽃인 걸 잠깐씩 잊으며

노랑 옆에 초록을 두는 진부한 속임수

스물이, 마흔이, 노랑빨강파랑,


저 눈부신 것들이 꾸려가는 감옥의 나날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반복이 문득 끊기는 귀퉁이

모란은 자라서 가시나무가 되고


감추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갇혔다는 걸 알 때쯤

이 평면도의 출입구는 봉쇄될 것이다


도대체! 조각보 한 장에 다 들어가는 일생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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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톱 깎는 새벽



조간신문 한 장 반듯하게 펼쳐놓고

스스로 뼈를 깎는 엄숙한 새벽이다

유월 숭어를 낚는 낚시바늘처럼 단호한 엄지발톱

건드리기도 전에 등줄기 부르르 떨린다

제 살을 파고느는 뼈의 속성은 발톱을 뽑아버리면 피해 갈 수 있다지만

발톱이 빠진 엄지발가락은 더 이상 엄지가 아니다


발톱 없는 발가락의 무심에 속절없다

잊을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이라지만 기억만큼 두려운 통증은 없다


그만큼과 이만큼의 차이를 설명하지도 못하면서

뼈를 깎는 고통을 요구하는

세상을 걷어차기 위해

새벽 창가에서 발톱을 깎는다


떠났거나 지워진 것들의 전언처럼

속살을 파고드는 엄지발톱을 반창고로 밀봉한다

개봉하지 않기로 한 상처의 목록이 점점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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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협곡



나의 꿈속은 늘 죽은 이들로 붐빈다


내 꿈이 영토의 전부인 저들이 밤마다 몰려와 나를 살핀다

내가 꿈의 국경을 넘을까봐

어느 날 갑자기 국정을 폐쇄할까봐

한무더기 먼지처럼 옮겨다니며 잠복근무 중이다


몸을 던져 영혼을 건진 자들이 깃발처럼 흔들린다

또 다른 영토를 발견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밀서가 떠돌고

검은 달을 방석처럼 깔고 앉아 남은 뼈마디를 헤아리거나

덧칠한 이름을 씹어 먹는다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낄낄거리며 제 살점을 뜯는다

온몸을 뒤적여 알뜰히 발라 먹었으므로

아무리 내달려도 물집 잡힐 발바닥이 없다

부르터 툭툭 처질 입술이 없다

누군가를 기다려 진땀 나는 손바닥이 없다

입을 열면 눈물 반 웃음반의 목소리 터질까봐 함구령이 내렸는지

도대체 저들은 말이 없다

마침내 저들은 거칠 것이 없다


나의 꿈속 왕국은 골짜기 깊고 험해

그림자 없이 떠도는 저들조차 그 끝을 모른다


죽은 자들과 밀고 당기는 나는 꿈에서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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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혀



  첫차를 타고도 설레지 않는 나를 분석하는 중이었다


  기아변속 중인 버스가 '에혀' 하고 한숨을 내뱉는다 다시 들어도 틀림없는 '에혀'다


  무릎을 짚고 끙, 힘을 주며 차에 오르는 단골들은 몸속에 고사목을 쟁여두었는지 여기저기서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아코디언 주름처럼 겹겹이 접힌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에혀'를 노랫말쯤으로 여길 만도 한데


  단골과 보조를 맞추려는 것이거나 제가 싣고 가는 '에혀'의 무게가 힘에 부치는 건 아닐지


  달리는 차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접거나 벗어든 신발을 탁탁 터는 단골들을 흘낏거리며


  '에혀', 신음소리처럼 들리는 소리의 힘으로 버스가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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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미라 시집 <이것은 어떤 감목의 평면도이다>에서


***박미라 시인 : 199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시집 <우리 집에 왜 왔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