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읽기·책읽기

모서리는 번식한다 외 3편/유희

섬지기__황희순 2018. 2. 6. 19:29


유 희


모서리는 번식한다 외 3편




직진의 습성이 잘리고 쪼개진 자리

어루만지고 눌러보고 비벼본다


곧게 자란 꿈이 꺾였을까

단면에 드러나는 둥근 테

둥글게 감춰둔 비밀이 들켰을까

변명할 사이 없는 시간의 파편


진저리는 통증의 흔적들

모서리에 자꾸 손이 간다


상처는 종종

더 깊은 상처로 위로받고 싶어

모서리에 부딪히고 긁혀 상처를 깨운다

목은 상처를 키운다


숨이 멎을까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어둠을 뚫어주는 창이 되라고

막다른 길 홀로 서성이는 날에는

바람을 베어 계단을 잊는 검이 되라고

모서리를 다듬는다


꿈도 비밀도 부끄러운

모서리는 번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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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찾기 1




따뜻했던 골목길을 찾지 못한 내가

따뜻한 골목길로 돌아가고 싶은 나에게

미안한 날이 있다


작별의 수인사도 없이 잊었던 인연들이

가랑잎으로 날리는 즈음

강기슭으로 돌아오는 연어들이

안간힘으로 죽어가는 만추 즈음

지친 바람들이 드나드는

골목 어귀를 찾아간다


물배급소집 수도꼭지 앞부터 모퉁이를 돌아 줄을 선 양동이들

기울어진 송판 울타리에 꽃송이 같은 노랑버섯 무더기

설탕 발라 씹으려고 부뚜막 찬장 턱에 붙여놓은 단물 빠진 껌

마루 대들보 옆에 막걸리 주전자

문턱 좌우로 다듬잇돌과 요강단지

시발택시 기사 흉내하며 돌려대던 축음기 회전판

그을린 종이 상판 자리에 담요로 말아 이불 덮은 양은 밥통

골목 막다른 큰 변소 똥통 뒤 똥바가지 구멍을 빠져나오면

이웃 골목으로 이어지던 골목에 더는 들어가지 못한다


몰려드는 바람도 굽이굽이

갈림길에 길들여지고

따뜻하게 잠들었던 골목길은

오늘도 행방불명이다


죽어 마땅한 사연 없이 살면서

숨바꼭질하듯 몸 숨길 일 없이

술래가 되어 찾을 이도 없이

샛별이 눈뜰 무렵 골목 어귀를 맴돌아본다

골목 밖으로 쫒겨난

골목 그 어귀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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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찾기 3




천장을 달리던 생쥐들은 모두 골목길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햇살 닿지 않는 담장 쥐구멍에서 새끼 치고 살다 흙바람이 되었을 것이다


재개발 철거 후 셋방 살던 골목 끝 집 번지수는 없어지고

쥐 오줌자국 같은 구름이 이따금 근처를 무심히 흘러갔을 것이다


천장에 한살림 차리고 놀아나던 생쥐소리 그 아래 궤짝 살림 넘나들며

고양이놀이하던 어린 형제 웃음소리 바람 끝에 달려온다


둥지 잃은 부엉이가 벌목 산기슭을 맴돌듯 어스름 깊어지도록 서성인다

골목을 떠난 모든 길은 낭하였다


길은 차갑고 기억만 따뜻해지는 골목 어귀에서

시려오는 발길을 돌리며 그림자를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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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햄스터가 쳇바퀴를 돌리며

고요의 파장을 흔들고 있다


햄스터는 숨이 가쁘고

가뭇한 좀생이별자리를 찾고 있는

나는 숨이 더뎌진다


처마 모서리 거미줄에

길목 잡힌 반달이 금실에 앉아

한숨을 쉬고 있다


읽을수록 알 수 없는 당신의 뒷모습

오늘은 그림자도 볼 수 없고

당신을 찾아가던 길들이 쳇바퀴에 감기고 있다


어둠의 소용돌이 중심에 햄스터가 앞발을 모으고 앞니를 드러낸다

나를 갉아 무너뜨리려나보다


꿈길마저 나를 거부하는 새벽 세 시

어둠에 꽂혀 있는 나는

허수아비다 솟대다 똥자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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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 시집 <틈새>에서 발췌


***유희 시인 : 전주 출생/1995년 '심상' 등단/시집 <우체통이 있는 길목에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