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詩 비평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부위별로 팔아요>

섬지기__황희순 2015. 12. 22. 19:35

문학화제
몸의 서사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 (140)
기사입력: 2013/04/22 [10:38]  최종편집: ⓒ 문화저널21
 
홍일표

 

 

부위별로 팔아요
 
황희순

 
나를 사가세요. 부위별로 팝니다. 흐벅지진 않지만 오십여 년 숙성된 살이 말랑말랑할 거예요. 세상을 휘젓고 다닌 팔과 다리는 좀 싸게 팔아요. 엉덩이에 난 바람구멍은 살짝 도려내고 드세요. 가슴에 영영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만들지도 몰라요. 젖가슴과 허벅지는 할인되지 않아요. 입술은 혀를 끼워 팝니다. 혀 없는 입술은 좀 싱거울 테니까요. 갈비뼈 사이엔 아팠던 흔적이 사리처럼 끼어있을 거예요. 약이라 생각하고 꼭꼭 씹어 드세요. 간장은 다 녹아 못쓰게 됐을 거예요. 진창도 풍덩풍덩 밟았던 발과 아무나 덥석덥석 잡았던 손이 문제군요. 아랫도리를 통째로 사가면 손은 덤으로 드릴게요. 잠 안 오는 밤 혹시 위안이 될지 모르니까요. 발은 팔지 않을래요. 갈 곳이 있거든요. 꼭 한번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껍질은 살살 벗기세요. 입맛에 맞게 회를 뜨든지 탄력이 없다 싶으면 소금구이해 드세요. 뼈는 잘 고아 조금씩 마셔요. 뼛속 깊이 사무쳤던 일 많아 독이 있을지 몰라요. 아, 당신이군요. 어떤 부위를 잘라드릴까요.
 
 
 
# 흑모가 백모가 되는 나이 50을 지나면 세계는 헐거워지고 대립과 긴장 대신 순두부처럼 물렁물렁한 일상, 지루한 반복의 연속인 경우가 많다. 설렘도 광기도 모험도 없는 삶, 패대기치지도, 새로운 일을 저지르지도 못하고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안락한 소파의 나날이다.
 
여기 그런 삶을 송두리째 던져버리고 50년을 부려먹은 육체를 팔아넘기고자 하는 시인이 있다. 「부위별로 팔아요」라는 도발적인 제목이 눈길을 끌었고, 나도 모르게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중년의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삭제하고 절단하고 싶어하는 존재였다. 치열한 성찰이 전제된 텍스트에는 평면적인 센티멘탈리즘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어설픈 감상의 목을 단호하게 비틀어버리는 엄정한 의지가 똬리 틀고 있다.
 
매장 주인은 신체를 나누어 팔기 위해 부위별 서사를 진술한다. 그 서사는 살아온 생의 이력이며 시적 주체의 뼈아픈 생의 발자취다. 팔과 다리, 엉덩이, 젖가슴과 허벅지, 갈비뼈, 입술, 혀, 간장, 발과 손, 살과 뼈 등이 매장에 놓일 것들이다. 신체별 부위에는 각각의 사연이 얽혀 있다. "영영 메울 수 없는 구멍”으로 대변되는 시적 화자의 내면 풍경은 존재의 허기와 갈증의 점묘화이다. 통증의 흔적과 “다 녹아 못 쓰게 됐을” 간장, 거친 세파에 시달렸던 손과 발, “뼛속 깊이 사무쳤던 일” 등은 진창 같은 삶을 견뎌온 자의 온갖 애환과 고초이다. 그런 생의 신고 속에서도 “사리”가 된 것도 있고, 때론 “독”이 되어 나타나는 것도 있다.
 
그러나 화자가 팔 의사가 없는 부위가 있다. 바로 “발”이다. 그 이유는 “갈 곳”이 남아 있고, “꼭 한 번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다 버리고도 끝까지 삭제하거나 절단할 수 없는 삶의 오롯한 대목이다. 이 부분이 일부 여성시가 보여주었던 가학적 포즈의 시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생의 아픈 부위를 도려내는 행위는 일종의 제사 의식과 통한다. 절단은 단순한 신체 훼손의 의미가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잘라내는 행위이고 스스로 통증의 극단까지 자신을 몰아세우는 일이다. 결국 제사의 대상은 시적 주체의 과거이고, 신체 절단은 일종의 소지 의식과 연결된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고통의 극지에 선 화자는 “갈 곳”에 생의 에너지를 집중한다. 재생과 변전의 국면으로 가고자하는 마지막 제례이다.     
 
존재의 성찰이 자아 해체를 통해 도달하고자하는 “갈 곳”은 이 작품의 비상구이다. 그 비상구를 빠져나와 곳곳에 흘린 발자국을 지우고 별이 되고자하는 시인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꽃 없는 봄밤이다.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