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읽기·책읽기

도망/최승자

섬지기__황희순 2014. 8. 18. 10:47

 

도망

 

최승자

 

 

 

 

잠결에 무엇인가 내 꼬리를 물었다.

그것은 나의 항문 속으로 들어와

창자를 거쳐 나의 위장 속으로

올라와 꼬물거리고 있다.

조만간 그것은 식도를 타고 올라와,

백일하에 내 입밖으로

환하게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재빨리

나는 내 몸을 바꾸어야만 한다.

다른 몸뚱어리를 만들어내

그 안으로 내 정신을 이입시켜야만 한다.

 

너희는 내게 한 상표를 붙여놓았다.

나는 그 딱지를 떼어내

너희의 입구멍에 보기좋게 붙여놓고서

재빨리 너희의 시야로부터 도망가버릴 것이다.

도망가 멀리멀리 숨어있을 것이다.

 

___최승자 시집 <기억의 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