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읽기·책읽기

안개에 대한 이해/안수환

섬지기__황희순 2013. 12. 7. 11:36

안수환

 

 

안개에 대한 이해

 

 

 

 

 

안개처럼 당신이 나를 덮었을 때는

길을 묻지 않았다 길 위에 서 있는 돌을 뽑아

가슴에 옮겨 두고 밤새도록 더 깊이 박아 놓았다

아니나다를까 아픔이 길인 것을

내출혈의 안개들은 내 腹腔 또는 胸腔을 가로질러

길이 되었다 묻지 말라 길을 묻지 말라

길 위에 서 있는 돌을 뽑아 가슴에 옮겨 놓았다

아니나다를까 내 아픔이 길인 것을

깨닫지 말라 깨닫지 말라 당신인 것을

 

 

 

 

 

낙숫물

 

가장 큰 禍厄은

진리를 유폐시킨 후

내 생애를 뭉그러뜨린 이 얼룩이라

그랬더니,

단숨에 문살을 건너온 반들반들한 낙숫물이

내 뺨을 때렸다

 

쨍그렁

 

이제 겨우 당신을 위해 비워둔

내 옆자리

 

 

 

 

 

신호

 

 

 

 

개미 한 마리를 건드리자마자

주변에 있는 일개미들이 한꺼번에 흩어졌다

신호 발신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

 

내 앞으로 달려오는 신호엔 무관심했지만

면밀히 조사해볼 때

그러니까 나는

개별 입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목적지까지 함께 가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의 명령인지 경고인지는 몰라도

 

 

 

 

 

폭포

 

 

 

 

 

귀납은 오래 기다려야 한다

결론을 얻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수직이 아니니까 폭포가 아니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붙들고 대롱대롱 매달리는 축복이 아니니까

 

나는 꼬리를 내렸다

꼬리를 내리다못해 꼬리가 아주 떨어져나간 것

겸손을 배우자마자 이번에는

뛰어난 선동가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내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이름은 비약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심미적 판단력이었다

 

내 몸은 그의 숙주라는 것

 

 

 

 

 

 

눈물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당신,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그 눈을 의심했다

그러니까 말인데, 꼬물거리는 물체로 말한다면

당신은 당신을 채우는 공간일 뿐

 

어둠이 보석인 줄도 모르고

 

 

 

 

 

 

저녁 7시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저녁 7시,

 

날 찾아올 사람 없지만

지금 누가 올 것만 같다

물파스 붙인 경옥이 올 것만 같다

씨애틀에 있는 엘리자벳 올 것만 같다

 

동남풍은 북풍이었지만

일보 직전에 변형된 것

일보 직전 내 마음도 바뀔 것이다

 

한 걸음 두 걸음 만 걸음마다

 

 

 

 

 

습도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참새가 날아와 시끄럽게 쫑알거려도

햇볕 나지 않았다

 

내 나이를 물으면

나는 약 5억 년쯤 살았다고 대답할 거다

 

당신을 떠나보낸 하중이 그만했으며

당신을 사랑하는 하중이 그만했으며

 

 

 

 

 

나는 띵이다

 

 

 

돌멩이를 보면 머리가 띵해진다

 

밤하늘을 보면 머리가 띵해진다

 

70년 나를 데리고 온 당신에게 말하노니

 

나는 띵이다

 

 

 

 

 

텍사스

 

 

 

근원과 현존의 낙차를 부정한 데리다의 생각이 옳다면

결국은 내가 없다는 말인데,

평생 질기디질긴 꿈을 꾸면서 예까지 온 나를

그러니깐 메뚜기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말이다

텍사스산 중질유 혹은 천연가스라도 불러도 되지 않을까 말이다

 

한 달 동안 내가 쓰는 신용카드 대금은 평균 9십8만 원

100만 원이 채 못되는 금액이다

 

나는 텍사를 야금야금 파먹을 뿐

 

 

 

****안수환 시인 :

․세종시 전의면 출생

․1973년 ≪시문학≫ ≪문학과지성≫ 등단

․충남도문화상 수상

․시집 "神들의 옷" "눈부신 먼지" 등

․시론집 :詩와 實在" "우리시 천천히 읽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