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황희순 시집 <새가 날아간 자리>/임영봉(문학평론가)
#해설/ 황희순 제3시집 <새가 날아간 자리>
상처의 현상학
임영봉|문학평론가, 중앙대 교수
1. 잊어버린 진실의 세계
황희순의 세 번째 시집 <새가 날아간 자리>의 중심에는 ‘상처’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상처를 다루고 있는 시인의 언어와 상상력에는 피가 묻어 있다. 황 시인의 처녀 시집 『강가에 서고픈 날』(1993)과 두 번째 시집 『나를 가둔 그리움』(1996)의 서정적 세계에 친숙한 독자라면 『새가 날아간 자리』에서 목격되는 이런 변화의 양상은 당황스러운 성질의 것일 수밖에 없다.
『새가 날아간 자리』는 무심한 마음의 상태에서 편안하게 읽을 수 없다. 아니, 그 언어들은 처음부터 편안하게 읽혀지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있다고 말할 때 진실에 더 가까워진다. 편안하게 읽혀지기를 거부하는 이 시집 속의 언어들은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시집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상처의 언어가 읽는 이의 내면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새가 날아간 자리』를 읽어나갈 때 우리는 문득 다시 떠올리게 된다. 삶이란 상처다! 우리는 이 평범한 진실의 차원을 그동안 얼마나 잊고 싶어 했던가, 잊어버리고 살아왔던 것인가. ?새가 날아간 자리?는 우리 자신을 그 진실 앞에 마주 세운다. 거기서 시인의 상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고 그리하여 우리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아아, 죽은 듯이 엎드려 은밀하게 숨을 쉬고 있는 내 삶의 상처들이여.
모든 상처의 기원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누군가의 영혼과 육체 저 밑바닥에 숨겨져 있는 방과 같다. 모든 상처의 형식들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자기만의 방에서 자족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새가 날아간 자리』에 등장하는 상처의 세계 역시 자기 완결적이면서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 상처들은 자신의 자족적 삶 가운데서 늘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새가 날아간 자리』에서도 상처는 꿈을 꾼다. 자신이 ‘무엇인가 또 다른’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는 꿈꾸기 행위 속에서 상처는 비로소 자족적인 삶의 차원을 넘어 외부를 향해 열리고 타자와 만난다. 이것을 나는 ‘상처의 현상학’이라 부르고자 한다.
2. 상처라는 이름의 내면 극장
시인 자신이 「自序」에 밝혀 놓았듯이 이번 시집은 ‘견디기 힘든 시간들’에 대한 기억과 ‘어두컴컴한 골방’의 추억을 담고 있다. 이 기억과 추억은 ?새가 날아간 자리?의 시적 상상력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상처의 존재를 환기시킨다. 시집의 입구를 이루고 있는 ‘제1부’의 시편들은 『새가 날아간 자리』가 상처 위에 쌓아올린 집이자, 상처라는 삶의 형식에 바쳐진 진혼가임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고 있다. 1부를 이루고 있는 모든 시편들에서 우리는 모종의 상처와 마주치게 되는데 그 기원은 ‘상실’의 경험으로 나타나고 있다. 「산 자가 죽은 자에게」는 이 상실의 경험이 얼마만큼 치명적인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경우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말라
귀 막고 입 막고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고
웃통 벗고 이를 앙다물며 묶고 또 묶고
혹시 깨어나더라도 다시는 이 세상에
발 디디지 말라, 손도 내밀지 말라
손 묶고 발 묶고, 묶고 또 묶고
땅속 깊이 묻고도 불안하여
꼭꼭 다져 밟고 또 밟고
울며불며 뗏장 덮고
소금도 뿌리고
뒤돌아보고
또 보고
보고
또
이 쇄기 모양의 형태시는 상처의 무게와 거기에서 기인하는 고통을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여기서 시적 화자는 상처를 봉인하는 주술을 행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는 쇄기처럼 여전히 내 삶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 누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몸과 마음 어디에 쇄기 같은 것이 깊이 박혀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쇄기에 관통 당한 상태의 이런 시적 화자들은 자신의 상황을 인과응보의 차원,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 karma)으로 받아들이고자 하지만, 그 고통이 너무나 심대한 것이라서 차라리 업보의 차원을 부정함으로써 그 세계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칼’은 그래서 필요하다. 「칼 좀 줘볼래요?」와 「벌레 먹다」에서 칼의 용도는 화자를 짓누르고 있는 고통의 굴레, 업을 ‘잘라내기’ 위한 것이다. 문제적인 것은 이 칼의 또 다른 용도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칼은 ‘썩었거나’ ‘벌레 먹은’ 상태의 ‘나’를 자르고 도려내는 데 필요하며 이때 칼의 이미지는 ‘나’를 겨누고 있는 자학적 상상력의 표현으로 대두한다.
복숭아 껍질을 깎다가 벌레를 베었다
도막 난 벌레 한쪽은 복숭아 살에
또 한쪽은 끈끈한 칼에 붙어 꿈틀~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가슴을 쓰윽 긋고 지나갔다
하얀 피가 묻어났다
벌레를 도려내고 칼을 다잡았다
나머지 껍질을 깎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하루가 지나도록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복숭아는 밤에 먹어야 이뻐진단다, 얘야
상처도, 상처에 돋아난 뿔도, 먹으면 약이 된단다
아버지! 이제 그만 무덤에서 나오세요, 가을이에요
벌레 먹은, 아까워하던 당신 딸을 이렇게 깨끗이
껍질 벗겨 놓았어요, 이거 우리
같이 먹어요
―「벌레 먹다」
자신의 존재를 ‘썩어 있는’ 상태로 생각하고 이를 ‘도려내야 한다’는 상상은 ‘자기 부정’이면서 ‘자기 처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나’의 존재를 스스로 지워버림으로써 상처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이다. 이 욕망의 흐름이 극도의 자기 부정적 자학 심리와 연결되는 순간, 그것은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동물 변신(!)의 이미지를 낳기도 한다.
뱀이 침 뱉어 놓는다는 뱀딸기, 먹으면 한밤중 뱀이 기어들어 뱀 새끼 밴다 했다. 징그러운 뱀이 된다 했다. 할머니 말 믿기지 않아 빨갛게 익은 뱀딸기 따먹고 말았다. 맛대가리 없는 그것을 몰래 꿀떡 삼켜버렸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느물느물, 뱀이 되어갔다. 똬리 틀고 앉아 주변 사람을 날름날름 약 올렸다. 이 땅을 내 땅이라고 우기며 독을 품어댔다. 새끼까지 잡아먹고 어둔 골방에 숨어 혼자 잠들곤 했다. 흐린 날이면 먹잇감을 찾아 시장바닥을 어슬렁거렸다. 사람으로 둔갑한 나를 아직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뱀딸기 전설」
「뱀딸기 전설」에서 ‘나’는 사람이 아니라 ‘독을 품고 있는 뱀’이다. 다른 장면에서 ‘나’는 ‘개’(「봄이면 나는 개가 된다」)이거나 ‘개-늑대’(「개가 늑대처럼 울어」)가 되기도 한다. 자신에 대해 스스로 ‘나’는 ‘썩었다’거나 ‘사람이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의식 내에서 주체로서의 ‘나’ 또한 해체되어 버린다. 1부의 많은 시편들에 등장하는 ‘나’는 분열된 주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절단-파편의 이미지를 통해 그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봄은 왔는데」에 등장하는 ‘그녀’는 지금 “몸통만 남아 펄럭인다.”
1부의 시들에서 시인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상처의 고통이 폭력에 대한 경험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일단, 시인에게 있어 폭력은 압도적인 무게를 지닌 상처의 현존 방식으로서 쇄기에 짓눌리는 피학의 경험을 의미한다. 이 피학적 폭력의 경험은 자학적 상상력을 낳고 때때로 가학적 충동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꾸기도 하는데 이때 시인이 안고 있는 상처의 내면은 폭력적 상상력이 난무하는 극장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극장에서 상연되는 이야기의 연출자이자 배우 또한 시인 자신이라는 점이다. 그 자신이 극장이자 연출자이며 배우가 되는 이 폭력적 상상력의 세계는 상처의 내부에서 자신의 상처와 싸우는 시인의 내면 전쟁에 다름 아니다.
시인의 삶과 존재가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도 바로 그런 싸움의 과정 속에서이다. 여기서 싸우는 행위가 하나의 ‘움직임’이라는 측면을 강조할 때 이 시인의 체질은 정적이라기보다는 ‘동적’인 것으로 확인된다. 『새가 날아간 자리』에서 이 움직임은 시인의 존재 변이를 뒷받침하는 근본적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시인이 건설한 상처라는 이름의 왕국, 그 어두운 극장의 스크린은 내면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운동’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찔리거나’ ‘쑤시고’, ‘잘리거나’ ‘도려내는’ 일련의 위상 반전적 운동성의 세계이다. 「발효를 위하여」와 「시간 우리기」 같은 시들은 이 내면의 움직임, 운동성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고 있는 경우이다.
莊子를 읽는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려는 건 사람밖에 없다. 내 다리는 온전한가, 두 눈 부릅뜨고 나는 살아 있는가. 간밤 가슴을 헤집고 비어지던 눈물은 누굴 위한 것이었나. 담배에 날개를 달아준다. 겨드랑을 만져본다. 땅위를 걷는 것도 이젠 진절머리가 난다. 전화벨이 머리채를 두 번이나 쥐어흔들다 놓는다. 환각인가보다. 가슴이 뛴다. 창틈으로 팔을 들이민 햇살이 얼굴을 문지른다. 눈 코 입 귀 차례로 지운다. 누군가 쿵쿵 등을 밟고 지나간다. 빈 포대처럼 피식 찌그러진다. 바람이 분다. 어떤 영혼이 돌부리에 걸리듯 또 먼 길 떠나는가, 창문이 덜컹거린다. 등 돌린 이를 바라보는 일은 늘 쉽지 않은 것, 강을 건너간 그 애는 고요한데 나는 왜 이렇게 휘청거리나. 莊子를 다시 읽는다.
―「발효를 위하여」
이 시는 그 자신이 극장이자 배우인 ‘나’가 ‘관객의 위치’에서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으로서 존재한다. 지금 ‘나’는 학의 다리를 자르는 일, 그러니까 상처라는 이름의 극장에서 전개되는 폭력적 상상력의 세계가 ‘환각’의 차원임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으며 자기 존재의 분열성에 대해서도 자각적이다. 여기서 “두 눈 부릅뜨고 나는 살아 있는가”라고 스스로 묻고 있는 ‘나’는 자신의 상처를 응시하는 ‘나’이며 그 응시 행위를 통해 주체의 위치를 되찾아 나가는 ‘나’이다. ‘나’는 이제 상처로부터 해방되어 본래의 자기 자신 속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한다. 그래서 ‘나’는 장자를 읽고 또 읽는다. ‘나’의 장자 읽기는 자신의 ‘발효’에 대한 의지, 그러니까 자신이 무언가로 바뀌어져가면서 종국적으로는 거듭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의 갈망은 「시간 우리기」에서 “헝클어져버린, 나를 비벼 먹”거나 “속이 다 썩어버린, 나를 찍어 먹”는 행위로 표출되고 있다. 이 시에서 흥미로운 것은 ‘나’의 갈망이 ‘먹기’라는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새가 날아간 자리』에 자주 등장하는 이 ‘먹기’는 주체의 분열성과 함께 부정의 상태를 부정하는 행위를 통해 긍정에 이르는(!) 탈중심적인 유목적 욕망의 흐름을 드러내고 있다.
3. 유희와 대화의 상상력
모든 상처는 자신만의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뿌리’는 깊고 은밀하다. 그로부터 상처는 여러 갈래의 ‘줄기’로 뻗어나가 무성한 ‘잎사귀’들을 거느리게 되고 마침내 맨 꼭대기에서 ‘꽃’을 피워 올리는 법이다. 여기서 꽃은 상처 입은 시인의 내면을 표현하는 가장 훌륭한 비유의 형식이라는 의미를 띠고 있다. 물론 <새가 날아간 자리>의 상처 자국에서도 꽃은 피어오른다. 「시들지 않는 꽃」에서 “모든 꽃은 상처”, “시들지 않는 지겨운 상처”이다. 이러한 의미의 꽃은 날것 그대로의 상처, 고통스런 기억 그 자체에 다름 아니기에 ‘자르거나’ ‘먹어버려야 할’ 그 무엇이다. 이 꽃은 자학-가학의 폭력적 상상력이 연출되는 내면 극장의 많은 소도구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이 꽃의 비유가 일정한 깊이에 도달할 때 상처의 기억은 다른 의미를 띠고 나타난다.
장미 흐드러진 돌담길, 백발노파가 활짝 핀 꽃 한 송이 꺾어 들고 지나가는 사람 코에 대주기도 하면서 비척비척 걸어가요 쏜살같이 지나가 버린 청춘 꺾어들고 향기를 뿌려요 주름진 얼굴이 화사해요 누군들 꽃 같은 시절 없었겠어요
막 피려는 꽃이 있었지요 내 작은 정원에 돋아난 이쁜 꽃봉오리였어요 어느 날 그 꽃 꺾이어 가슴 깊이 묻었어요 그 꽃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을 찔러요 피가 흥건해요 이건 꿈인지도 몰라요
前生에 나는 서천국 사람이었대요 큰 죄를 지어 사람으로 환생했대요 善心을 베풀지 않으면 죽어 제사도 못 얻어먹는대요 아마 전생에 막 피려는 꽃을 꺾었나봐요 그 꽃에 찔리며 今生을 살아요 이건 정말 꿈인지도 몰라요
―「꽃에 찔리며 살아요」
「꽃에 찔리며 살아요」는 시인의 상처에서 솟아오른 가장 아름다운 꽃, 그러니까 상처의 시적 승화라는 측면에서 가장 성공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시 속에서 꽃은 여전히 상처를 환기시키고 있지만 그것은 이제 하나의 운명을 의미하고 있다. 꺾인 꽃을 가슴에 깊이 묻고 살아가는 것처럼 여기서 상처는 운명적인 것으로, 삶의 일부로 수용된다. 2부의 「변신」에 등장하는 꽃 모티프는 더욱 흥미롭다.
가으내 꽃처럼 피어 있던 홍시
똥덩어리처럼 변신하여 동면에 들었다
함박눈 내리고 까치가 쪼아대도 꿈쩍 안 했다
봄이 성큼 다가와 동면에 든 그를 흔들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목 떨어져라 그 광경 지켜보다 깜빡 졸았다
조는 사이 가을 깊어져 환하게 홍시 다시 피어나고
말라비틀어진 그는 나무 아래 나뒹굴고 있었다
그가 꽃 같은 홍시였다는 걸 사람들은 다 잊었다
그를 주워 쪼글쪼글한 살 속 깊이 파고 들어가
달콤한 동면에 들었다 똥덩어리처럼 변신했다
명년 가을쯤 나도 내가 사람이었다는 걸 잊을 수 있겠다
―「변신」
시인은 홍시를 보면서 꽃을 떠올리고 있다. ‘꽃처럼 피어 있던 홍시’나 ‘꽃 같은 홍시’라는 비유가 그것이다. 이 비유 가운데서 꽃처럼 피어 있던 홍시와 꽃 같은 홍시는 ‘홍시-꽃’의 이미지가 되어, 완전히 무르익은 시인의 상처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홍시꽃이 똥덩어리로 변한 것처럼 ‘나’의 상처 또한 숙성되어 미지의 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기대,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존재의 변이를 꿈꾸는 시인의 욕망을 그대로 투사하고 있다.
2부의 시들은 「변신」이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은 ‘변화’의 모색과 시인의 존재 변이 과정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이런 변화와 변이에 대한 시인의 추구는 ‘나’가 반가부좌 자세의 선경(禪境) 상태에서 ‘자기 존재’를 응시하고 있거나(「덫」), 책 속에서 ‘길’을 찾고 있는(「책 속에 길이 있다기에」1/2) 행위에 함축되어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는 가끔 길을 잊어버리거나, 여전히 길을 찾고 있는 중일 때도 있다. 「다시, 상처 핥기」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와 같은 자기 응시와 길 찾기 행위는 “낯설어진 나를 끌고 먼 길을 돌아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그런 ‘나’의 복귀 과정이 ‘나’의 변신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가 아닌 낯선 존재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변한’ 셈이다. 그래서 ‘나’는 “거울 앞에 서서 나를 구석구석 더듬어본다/코도 풀어보고 귀도 쑤셔보고 밑도 만져보고/아-아-, 소리도 질러보고” 한다. 변신, 즉 존재 변이의 과정에 있는 ‘나’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가 낯선 장소이다. 그리고 이때 ‘나’는 유희적 상상력의 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물리치료사가 가슴을 염하듯 묶어 침대에 고정시킨다 엉덩이 묶은 줄을 기계가 잡아당긴다 우지직 허리가 늘어난다 윗몸과 아랫몸이 따로 논다 그의 사랑 생각하는 가슴과 그의 몸 생각하는 아랫도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못을 박는 듯한 허리 통증이 잠시도 멈추질 않는다 침대가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한다 당겨진 아랫도리가 몸에서 쑥 뽑혀 병실을 걸어 나간다 꽁꽁 묶인 겨드랑이께가 근질근질하다 이젠 정말 가볍게 날 수 있겠다
두 동강 난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나를 견인 중이다
―「나를 견인 중이다」
이 시 속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 ‘나’는 자신의 몸이 두 동강 나는 상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랫도리가 몸에서 쑥 뽑혀 병실을 걸어” 나가는 신체 절단의 이미지가 전혀 끔찍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를 견인 중이다」는 1부의 많은 시들과는 확실하게 다른 어떤 세계를 드러내고 있는 경우이다. 「나를 견인 중이다」에서 세계는 재미있고 유쾌한 놀이의 공간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 세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유희적 상상력의 주체로서의 ‘나’이다. 괴이한 병원에서 이상한 치료를 받고 “이젠 정말 가볍게 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나’는 호기심과 순진함, 장난기로 가득 찬 어린아이를 닮아 있다. 「나를 견인 중이다」에서 유희적 상상력은 세계를 해체함으로써 억압으로부터 주체를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의미의 유희적 상상력은 「나 찾아봐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썰물 나간 대천 바다 조그만 바위섬에 갇힌 쉼표만한 소라게들. 어떻게 찾았을까 제 몸 둘 만한 소라껍질. 제일 큰 놈을 잡아 들여다보니 감쪽같이 숨는다. 아흐 나는 어디에 숨나, 지리멸렬한 세상 이 큰 몸뚱어릴 어디에 숨기나. 백사장을 정신없이 게걸음질치다 숨어든 제일여관 2층 허름한 방, 홀랑 옷을 벗고 물음표같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나 찾아봐라!
‘나 찾아봐라’라는 장난기 가득한 물음의 형식이 그 점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거니와 「나 찾아봐라!」에서 유희적 상상력은 세계와의 대화 수단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행위 가운데서 시인의 삶과 존재는 비로소 상처의 독백을 넘어서서 외부 세계, 타자들과 만나게 된다. 이번 시집을 읽어나가는 동안, 나는 그러한 의미의 유희적․대화적 상상력이 시인의 세계를 행복으로 이끌어 나가는 저변의 요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三手觀音像」은 이 유희와 대화를 향한 시인의 은밀한 욕망을 보여주고 있는 경우이다.
옆구리께 비밀스런 손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네 주머니에 숨었다가 잘난 체하는 놈 깝죽대면 내 참을성과 상관없이 툭 튀어나와 뒤통수 한대 갈긴다거나, 세상사 자꾸 꼬여 아무에게나 주먹질하고 싶을 때, 눈매 깊은 사내 있어 옆구리 한번 쿡 찔러보고 싶을 때, 온갖 구정물에 빠뜨려 주눅 든 두 손 대신 깨끗이 놀아줄 씩씩한 손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네
‘비밀스런 손 하나’를 더 가지고 싶다는 시인의 ‘소망’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동안 이 유희와 대화의 상상력은 시인 자신의 어두운 내면 극장에 잠시 유폐되어 왔을 뿐이다. 유희적 상상력의 발현으로 특징 지워지는 「나 찾아봐라!」의 의미는 「내 구멍에 갇히다」라는 또 한 편의 시와 나란히 놓일 때 더욱 선명해진다.
열아홉 살 여름이었다 은선네 집에 화장품 장수가 왔다 화장품 살 돈이 없었다 뿔을 감추고 곳간에 숨어들어 쌀을 몇 되 펐다 쌀자루를 끌어안고 개구멍을 빠져나가다 새참 가지러 온 할머니에게 들켰다 깜짝 놀란 할머니는 못 본 척했다 나도 못 본 척 쌀을 질질 흘리며 개구멍을 개처럼 빠져나갔다 그 구멍 빠져나갔더니 또 다른 구멍이 있었다
그곳에 영영 갇히고 말았다
「내 구멍에 갇히다」의 중심을 이루는 ‘구멍’의 이미지가 자아의 억압과 폐쇄성을 드러내고 있다면 「나 찾아봐라」에서 그것은 숨바꼭질이라는 재미있는 놀이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자의 ‘나’가 외부 세계에 대해 ‘닫혀 있는’ 상태임에 반해 후자의 ‘나’는 ‘열려 있다.’ 「나를 견인 중이다」와 「나 찾아봐라!」 등의 시들을 읽을 때 우리는 시인의 변신 혹은 ‘다른 존재로 되기’를 낙관하게 된다.
가족 체험을 소재로 한 3부의 시들은 시인의 존재 변이 과정과 관련되어 있으며 3부 전체는 시인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 편의 가족 드라마를 펼쳐 보여준다. 물론 이 가족 서사시 역시 상처의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여기서 주인공 ‘나’의 상처, ‘상실’의 기억은 새로운 의미를 띠고 대두한다.
이승에서 다시 볼 수 없는 피붙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수진이
한점 정물화로 남은 그들은 아직도 슬픈
내 기억의 중심에 있다
슬프다는 것, 처음엔
뽑아버리고 싶은 이물질이다가
언제부턴가 들여다보며 살더라
깊이 박힌 못처럼 숨조차 쉴 수 없던 것이
점점 헐거워지더라, 헐거워진 그곳으로
숨을 쉬더라
「기억의 중심」에서 시인은 마침내 상처로 남은 기억의 중심, ‘상실’의 경험이라는 ‘깊이 박힌 못’이 빠지는 순간으로부터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 왔던 존재 변이를 이루어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쇄기’의 무게에서 풀려난 시인은 그 쇄기자국으로부터 오히려 숨을 쉬고 있다. 여기서 상처는 새로운 ‘생명’의 자궁이다. 「기억의 중심」은 상처의 궁극적 봉합이자 그를 통한 시인 자신의 삶과 존재에 대한 회복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금 시인이 서 있는 자리는 어디쯤일까. 그것은 아마도 4부의 일상 세계일 터이다. 일상 세계로 복귀한 시인의 마음과 몸에는 아직도 상처 자국들이 남아 있다. 자신의 본디 삶과 존재를 회복한 시인이 그것과 대화하는 자신의 언어를 찾아나가는 데는 다소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시인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향해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이다. 「投身」에서 시인은 세계를 향해 이렇게 속삭이고 있다. “내 몸은 지금 납작해졌다 날카롭던 모서리도 동글동글해졌다 손안에 쏙 들어가게 작아졌다, 눈짓만 하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