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읽기·책읽기

불쑥, 불혹/유정이

섬지기__황희순 2010. 5. 24. 20:49

불쑥, 불혹

 

유정이

 

 

길 안쪽에 엎어졌는데

몸 일으키니 길 바깥이었다

어디로든 나갔다 생각했는데

둘러보니 부엌이었다

밥물 끓어넘치는데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고 열쇠가 없어

울고 서 있었다

생각을 일으켜야겠는데

우래 입은 옷들이

발을 걸었다 호호호

내가 네 엄마가 맞단다

어서 문 열어주렴 꽁꽁 닫힌

문 속으로 언제나 불쑥

들어와 있던 엄마가

베란다 바깥 허공을 따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는 엄마를 붙잡아야겠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내 소리를 파먹은 게 분명해

거실에 넘어졌는데

눈 뜨니 부엌이었다

밥물은 끓어넘치는데

오래 입은 옷이 열쇠를 흔들며

호호호 웃고 있었다, 돌아보니

마흔이었다

 

---유정이 시집 <선인장 꽃기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