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이름(퍼온 글)/시집에 서명한 빨간색 글씨
<에세이>
빨간색 이름
우남희/동덕여대 아동학과 교수
20년 전 미국 유학 시절, 재학증명서를 떼러 학적과에 갔다. 직원은 내 이름을 묻더니 빨간 펜으로 Namhee Woo라고 적었다. 나는 심장이 딱 멈추는 것 같았다.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죽는다고 했는데 내 이름이 시뻘겋게 휘갈겨 써졌으니 말이다. 몰상식한 직원이 한스러웠지만 엎지른 물이라 체념밖에 할 일이 없었다.그런데 이상한 일은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미국 친구들은 서슴없이 빨간색으로 자기 이름을 썼지만 아무도 그래서 죽지는 않았다. 6년 동안 그곳에서 사는 동안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아무 생각 없이 빨간색으로 썼지만 나도 나의 가족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죽는다고 했을까?그 후 나는 베이징 자금성에 간 적이 있다. 자금성은 참으로 넓고도 아름다운 붉은 궁궐이었다. 건물마다 섬세한 조각, 엄청난 규모에 감탄하다가 나는 거대하게 솟아 있는 궁전의 붉은 기둥들을 보는 순간, 오랜 의문의 실마리를 찾았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설명은 붉은색이 황제의 상징이란다. 위엄의 상징이며, 삶과 환희의 상징이란다. 붉은 색은 궁궐의 색이고 황제의 색이므로 황제만이 붉은색으로 서명할 수 있었단다.나는 화가 났다. 중국의 황제 앞에서 초라했던 우리나라 왕들의 가여운 모습이 떠올랐다. 엄청나게 커다란 땅덩어리의 한쪽 끄트머리에서 독립국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 감격스러워야 하는데 어쩐지 중국의 선심 속에 살아남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우울했다. 너그러이 봐주는 황제 나라의 명령에 우리는 절대 복종해야만 하지 않았을까? 절대로 빨간색의 서명을 하지 못하도록 누군가가 시험해 볼 수도 없는 죽음과 연결시켜 선량한 국민을 우롱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죽을까봐 걱정돼 의심 한번 해보지 않고 믿었다는 것이 약올랐다.(열심히 까만색으로 이름을 쓰려고 애썼던 모습이 떠올라서 화도 치밀었다.)우리의 생활 속에는 근거 없는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그런데 우리는 의심해 보도록 허락받지도 격려받지도 못하고 자랐다. 모든 것을 지당한 말씀으로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잘 길들여져 의심 한번 안 하고 그대로 따르며 살았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의 아이들은 올바른 판단력과 정확한 비판력을 가지고 사실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라고 윽박지르지 말고 "왜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죽어요?"라고 물어볼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국민일보 2006-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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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에 붉은색 펜으로 서명을 해서 보냈다
표지와 같은 색깔의 아주 고운 붉은색 펜으로
위의 글 내용을 나는 어느 책에선가 읽어 이미 알고 있었다
몇몇 원로 시인에겐 그래도 혹시 오해할까봐 검은색 펜으로 했다
시집을 받은 ㅇ모 시인이 화가 났다고
그이와 친한 ㅅ모 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염려했던 사고가 터진 것이다
ㅇ모 시인에게 전화를 했다
붉은색으로 서명을 하면 죽는다는 말은
근거도 없는 말이며 사대주의 사상의 잔재라고
하지만 ㅇ모 시인은 한국인의 정서를 따라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본인은 괜찮지만 오해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 앞으로는 어쩌구저쩌구....
마음이 상했으면 용서하시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생각해 보니 그는 오해할 만한 60대 중반의 한의사였던 거다
근거 없는 일에 우리는 얼마나 끄달리며 살고 있는가
예를 들면 4자를 기피한다든가, 밤에 손톱을 깎으면 어떻게 된다든가 등등.....
살만해졌으니 우리 이제 좀 자유로워져야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