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오탁번
대한 추위 매섭던 날
보훈병원 병실에서 만난
둘째 형님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올해 여든세 살
평균수명 간신히 채운 형님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이승의 정지화면 같았다
문병 다녀온 그날 저녁
형님은
이승을 버렸다
3일장은 순간처럼 지나갔다
평생 고향을 지킨 형님은
제천 화장장에서
한 줌 재로 변했다
수골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울었다
이천 호국원으로 모시면서
나는 또 울었다
삼우제날 음복을 하면서
또 나는 울었다
입춘날 아침
거울을 보다가
앗!
나는 소리쳤다
형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작은 발
__영희 누나
오탁번
몇 년 전 가을
영희 누나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깜짝 놀라 춘천으로 달려갔다
당뇨와 고혈압에 치매까지 걸린
영희 누나는
실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__탁번이 왔니?
허지만 금세 말을 바꿨다
__누구신가?
나는 눈물을 훔치고
봉투 하나 놓고 나왔다
그 옛날 곱던 얼굴 간데없고
내 까까머리 쓰다듬어주던
어여쁜 손은
쪼글쪼글 마른 수세미외 같았다
다음 해 봄
영희 누나가 정말 위독하다는 전화가 왔다
나는 또 춘천으로 달려갔다
간병사가 매일 오고
며느리들이 번갈아 보살피고 있었지만
링거 주사 주렁주렁 달린 영희 누나는
그냥 숨만 붙어있을 뿐
사람 하나 알아보지 못했다
이제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누나 빨리 데려가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봉투 하나 놓고 나왔다
해가 바뀌고 또 바뀌었지만
춘천에서 전화는 좀체 오지 않다가
지난봄 어느 날
춘천에서 급한 소식이 왔다
나는 단숨에 달려갔다
하느님은 낮잠을 주무시는지
영희 누나는
눈도 못 뜬 채 나비숨을 쉬면서
가녀린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거미줄보다 더 가는
생명의 끈이 왜 이리 지지한가
나는 눈물을 머금고
봉투 하나 놓고 나왔다
가을이 왔다
영희 누나가 세상 떠났다는 메시지가
마침내 왔다
부리나케 달려간 성심병원 영안실
천연색 영정 속에서
그 옛날 영희 누나가 나를 불렀다
__탁번이 왔니?
시간이 딱 멈춘 텅빈 공간
향 내음이 민들레홀씨처럼 날아올랐다
입관할 때
누나의 조그만 발을 쓰다듬으며
열 살 아이처럼 나는 울었다
아아
영희 누나
**오탁번 시집 <알요강>에서
**오탁번 시인 :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시집 <겨울강> <시집보내다> 등
소설집 <오탁번 소설 1. 2. 3. 4. 5. 6.>
고려대 국교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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