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읽기·책읽기

형님 외 1편/오탁번

섬지기__황희순 2019. 5. 15. 16:02


형님


오탁번



대한 추위 매섭던 날

보훈병원 병실에서 만난

둘째 형님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올해 여든세 살

평균수명 간신히 채운 형님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이승의 정지화면 같았다

문병 다녀온 그날 저녁

형님은

이승을 버렸다


3일장은 순간처럼 지나갔다

평생 고향을 지킨 형님은

제천 화장장에서

한 줌 재로 변했다

수골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울었다

이천 호국원으로 모시면서

나는 또 울었다

삼우제날 음복을 하면서

또 나는 울었다


입춘날 아침

거울을 보다가

앗!

나는 소리쳤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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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발

__영희 누나


오탁번



몇 년 전 가을

영희 누나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깜짝 놀라 춘천으로 달려갔다

당뇨와 고혈압에 치매까지 걸린

영희 누나는

실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__탁번이 왔니?

허지만 금세 말을 바꿨다

__누구신가?

나는 눈물을 훔치고

봉투 하나 놓고 나왔다

그 옛날 곱던 얼굴 간데없고

내 까까머리 쓰다듬어주던

어여쁜 손은

쪼글쪼글 마른 수세미외 같았다


다음 해 봄

영희 누나가 정말 위독하다는 전화가 왔다

나는 또 춘천으로 달려갔다

간병사가 매일 오고

며느리들이 번갈아 보살피고 있었지만

링거 주사 주렁주렁 달린 영희 누나는

그냥 숨만 붙어있을 뿐

사람 하나 알아보지 못했다

이제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누나 빨리 데려가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봉투 하나 놓고 나왔다


해가 바뀌고 또 바뀌었지만

춘천에서 전화는 좀체 오지 않다가

지난봄 어느 날

춘천에서 급한 소식이 왔다

나는 단숨에 달려갔다

하느님은 낮잠을 주무시는지

영희 누나는

눈도 못 뜬 채 나비숨을 쉬면서

가녀린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거미줄보다 더 가는

생명의 끈이 왜 이리 지지한가

나는 눈물을 머금고

봉투 하나 놓고 나왔다


가을이 왔다

영희 누나가 세상 떠났다는 메시지가

마침내 왔다

부리나케 달려간 성심병원 영안실

천연색 영정 속에서

그 옛날 영희 누나가 나를 불렀다

__탁번이 왔니?

시간이 딱 멈춘 텅빈 공간

향 내음이 민들레홀씨처럼 날아올랐다

입관할 때

누나의 조그만 발을 쓰다듬으며

열 살 아이처럼 나는 울었다

아아

영희 누나 



**오탁번 시집 <알요강>에서

**오탁번 시인 :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시집 <겨울강> <시집보내다> 등

                  소설집 <오탁번 소설 1. 2. 3. 4. 5. 6.>

                  고려대 국교과 명예교수